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설교] 천국의 비유 강해 4

운영자 | 2005.05.28 13:25
천국의 비유 4(마 13:44-52)

1.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
오늘 우리가 배우게 될 비유는 매우 중요한 비유인데,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오류를 많이 범하는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펴보게 될 이 중요한 비유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지극히 값진 진주에 대한 것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마 13:44-46절.

이 비유에 나오는 ‘보화와 진주’는 수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구주되신 우리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가치를 발견한 죄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버리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이 천국 비유의 전체적인 흐름과 맞지 않을 뿐 더러, 또한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저는 몇몇 성도님들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형제님은, 또는 자매님은 천국을 얻기 위해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았습니까?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천국을 사셨습니까? 저는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께도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과연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가진 소유를 다 팔아 그리스도를 얻거나, 또는 구원받을 것 같으면, 그렇다면 그건 행위를 통한 구원아닙니까? 이 모든 문제는 마태복음의 천국을 ‘교회나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 마태복음이 과연 어떠한 책이며, 또 주님은 이 천국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결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도 아닙니다. 또한 천국도 보화나 진주가 아닙니다. 여기 말씀에서 상인이 보화나 진주를 찾아 나선 것처럼, 죄인은 구원을 받기 위해 결코 스스로 구주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죄인은 구주를 얻기 위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지도 않습니다. 또한 보화는 죄인에 의해 다시 숨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 전도를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먼저 믿은 우리들이 죄인들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복음이 필요한 죄인들을 우리가 찾아 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밭은 세상이며, 지금 이 비유에서  가르치는 위대한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시러 세상에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친히 하신 말씀을 통해 확증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주님이 찾으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보화와 진주(a pearl)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인 이스라엘과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보화는 지상백성인 이스라엘을, 진주는 하늘백성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보화와 진주를 어떻게 죄인에 대한 묘사로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해할 수가 있습니다. 많은 성경구절들이 죄인의 상태에 대해 분명하게 죄로 인해 타락되었고, 혐오스러우며, 파산상태에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상태를 보화나 진주에 대한 이미지와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해답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무언가 그분께 가장 귀한 존재로 변화시키고, 또 하나님의 아들을 주실 만큼 우리를 존귀한 존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스럽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를 닮는 데까지 내다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화가 되며 그분의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할 줄 아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할 것을 내다보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변화될 것을 아시며, 또한 나를 믿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영어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명품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를 인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인정과 믿음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바로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주심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로 하나님의 믿어주심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를 닮는 데까지 내다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필요한 각양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은혜의 보좌 앞으로 부르십니다. 날마다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십시오. 은혜의 지배와 통치를 받으십시오. 우리에게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내일이 있습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보화는 참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진주는 참 교회를 가리킵니다. 둘 다 천국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둘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상 백성들인 이스라엘이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이 될 것을 말씀하셨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비유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마태복음을 기록한 독특한 방법과 문체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다보면, 우리는 자주 마태가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태복음을 잘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에 어느 정도는 정통해있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말씀과 또 그 말씀들이 어떻게 성취되는지에 대한 안목과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마태복음에 대한 합당한 해석과 적용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바로 하나님이 구약성경에 약속하신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과 약속들이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한 언약과 약속들의 핵심은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하신 메시야 왕국의 성취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다섯 번 정도 ‘보화’라고 불렀습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 ‘내 소유’, 신명기 14장 2절 ‘자기의 기업의 백성’, 26장 18절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 시편 135편 4절 ‘자기의 특별한 소유’ 그리고 말라기 3장17절은 ‘나의 특별한 소유’
그런데 여기 우리 성경에 “소유, 기업의 백성, 보배로운 백성, 특별한 소유, 특별한 소유” 등은 모두가 다 히브리어인 시귤라(cegular)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바로 이스라엘이 그 보화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면 보화는 밭에 감추어 있었으나, 후에 이를 발견한 후 다시 숨겨두었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분명히 보화를 숨긴 의도는 후에 그 보화를 파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가르침은 매우 간단합니다. 밭은 세상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후에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피로써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특별히 메시야를 거절하고 살해한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화는 밭에 다시 묻어두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산 사람은 바로 그들의 메시야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메시야이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보화인 이스라엘만 구속된 것이 아니라, 밭인 세상까지 구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세 단어 곧 “감추인, 발견한, 숨겨두고”는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진술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스라엘과 관련한 하나님의 계획이 급속도로 전개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불신앙 상태에서 고토로 귀환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곧 “야곱의 환란의 때”라고 불리는 대환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야의 재림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스가랴 12장 10절에서처럼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개 후에 다시 여호와와의 언약관계가 회복될 것이고, 천년왕국 시대에 세상의 밭에 감추었던 보화가 캐내어져서 그 광채를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45절의 진주에 대한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진주(a pearl)는 하나의 단일체이며, 또한 살아있는 생물에서 나온 유기체입니다. 진주는 조개의 아픔이나 상처를 통해 형성됩니다. 따라서 진주는 "우리의 죄로 인해 상하신" 그리스도의 상처에 의해 형성된 교회를 가리킵니다. 진주는 바로 그리스도와 "한 몸"인 교회를 너무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캠벨 몰간이라고 하는 유명한 설교자는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주님이 유대인 제자들에게 이 진주에 대해서 설명할 때, 모두들 놀라며, 또한 의아해했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진주가 매우 값비싼 보석이지만, 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진주는 그리 귀한 보석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상인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진주를 샀다고 했을 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한편으론 어리석은 일로 생각되었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멸시했지만, 주님은 바로 그 멸시받은 이방인들, 곧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놀라운 복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빌립보서 2장 6절-8절, 우리 주님은 그 높으신 보좌를 버리고, 이 낮고 낮은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이는 마치 진주를 얻기 위해서는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처럼, 주님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 25-27절.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교회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 주님은 진주의 지극한 아름다움과 완전한 모습을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낼 때까지 진주를 얼마나 아끼며 잘 간직하실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인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친히 양육과 보양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볼 때, 우리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차고 넘칩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주의 사랑으로 벅차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6:19-20에서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처럼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물과 같으니
마태복음 13장 47-50절에는 그물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부와 그물은 성경에서 복음전파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천국 복음은 세례 요한과 우리 주님에 의해서 전파되었습니다. 주님 당시로부터 시작된 복음전파가 온 세상 끝까지 전파될 것이며, 이 세대의 끝에 대대적인 수확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바다에 친 그물을 물가로 끌어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비유가 특별히 세상 끝에 적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 끝이라는 말은 현 세대, 곧 천국 시대의 끝을 가리킵니다. 곧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지상 재림 직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이 공중 재림을 하시고, 교회가 휴거되면 이 땅에는 지상 대환란이 시작됩니다. 구약성경은 이 때를 가리켜 ‘야곱의 환란의 때’라고 말씀하고 있고, 이렇게 지상대환란을 허락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민족적으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뵙고 회심하였던 것처럼, 기적적으로 회심하게 될 것이며, 이 때부터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와 그분이 세우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전파하는 전도자들이 파송될 것입니다. 이 때 전할 메시지가 바로 천국 복음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전파되고 있는 은혜의 복음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천국복음과 은혜의 복음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대환란 기간 중에는 지금까지 은혜의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게 쏟아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 날은 두렵고 무서운 날이 될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구원받을만한 때요 은혜의 날입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왕으로 믿고, 영접하십시오. 나중에는, 혹은 내일에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 대환란 기간 동안 천국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곧 마태복음 24장에서 민족 심판시에 양의 민족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양의 민족 가운데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물에 가득찬 물고기들 중에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어 버리듯이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지옥불에 던져 넣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분류작업은 그리스도의 지상재림시 함께 할 천사들이 하게 됩니다. 이 대환란 시기에도 구원받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환란 기간동안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참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섭리해오신 모든 세대, 모든 시대 구원받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그 어떤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 우리의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그물 속에 좋은 것과 못된 것이 섞여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이 천국 안에는 오늘날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크고 작은 오류가 많이 더해졌으며, 기독교의 여러 종파와 그 이름들이 함께 세상 끝까지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진리와 오류가 혼재해 있으며, 좋은 것과 못된 것이 섞여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주님의 오시는 날까지 지속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친히 이 비유의 결론부에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천국의 참된 제자인 우리들에게 친밀하고 다정한 말로 장차 천국에서 있게 될 이러한 혼돈과 무질서의 상황을 우리에게 설명하기를 원하셨으며, 이로써 우리가 행할 때에 걸림이 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미 예고하신 대로 되어갈 때에, 우리는 너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끝까지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곧 그물이 가득차게 되고, 해변가로 끌어내어질 날이 오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잡은 고기들은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로 갈리게 됩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에 의해 영원히 분리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주님과 주의 오심을 더욱 갈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주님은 이 천국 비유를 말씀하신 후 물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그때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예 그러하오이다”. 저도 성도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으셨습니까? 대답해보십시오. 이제 주님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은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비유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을 가리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듣고 깨달은 우리 성도님들도 이제부터 천국의 제자로, 또한 제자된 서기관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집사람들에게 양식을 공급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복음전도자의 사역과 목자와 교사로서의 사역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곳간인 성경으로부터 양식을 집사람들에게 부지런히 공급해야 합니다. 집주인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기 곳간에서 내어오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비유에서 결실은 하나님을 향한 측면(Godward aspect)을 나타내고 있지만, 집주인이 내어오는 음식은 사람을 향한 측면, 즉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비유에서 결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이지만, 집주인의 비유를 통해서는 말씀을 지키는 최상의 길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묵상하고, 준행함을 통해 제자의 삶을 살며, 자신의 삶을 통해 경험된, 즉 자신에게 양식이 되었던 말씀들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어줄 때, 이것이야말로 합당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또한 다른 성도들을 섬기는 길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제자의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힘을 얻어 그 삶에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우리 하나님이 가장 가치있게 여기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한 다른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고, 그 일에 자신을 드리십니다. 그리고 할수있는한 다른 성도들을 도와주고, 또한 베푸는 삶을 사십시오. 성경을 찾지는 않겠습니다만, 창세기 17장 9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믿음은 우리 머리에 새길 것이 아니라, 몸에 새기는 것이다. 이런 뜻이 아닐까요? 성도님들께서 한번 말씀을 보시고 분별해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우리 제자의 삶은 우리의 신앙을 머리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 새기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우리 몸에 새길 때, 그때 비로소 경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경건한 삶은 이생과 내생, 곧 오는 세상에 큰 약속이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4:7-8)에서 말씀하신 것을 함께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그리고 6장 17일부터 보면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삶! 이것은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입니다. 경건한 삶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삶으로 인도해줍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곧 주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때 우리는 영원의 관점에서 우리가 살아온 날을 뒤돌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관점에서 바르게 볼 때, 우리는 어찌 그리도 짧은 인생을 아웅다웅하며 살았는지, 왜 좀더 하나님을 위한 선한 일에 나 자신을 드리지 못했는지,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잃어버린 무수한 시간과 기회들은 다시 돌이킬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영원을 계산하는 삶을 시작하면 됩니다.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고, 바로 오늘은 그러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또다른 하루를 선물로 주신 것이니 이 또한 즐거운 날이 아닙니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제자의 삶을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제자의 삶을 시작하시는 분들과 이미 제자의 삶을 살고 계신 분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넘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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