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설교] 천국의 비유 강해 3

이종수 | 2005.04.28 12:55
서언
빌리 그래함은 자신의 자서전[빌리 그레이엄 자서전/두란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중에는 여태껏 영국인을 상대로 말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목사들이 플리머스 형제 교회와 연관돼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약간 유리했다. 휘튼에서 형제 교회 사람들을 접하며 그들의 방법과 어휘를 조금 익혔기 때문이다. 차례가 되자 나는 "진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언제나 플리머스 형제 교회 소들의 우유를 얻어 마셨다"던 시카고 무디 교회 H.A. 아이언사이드의 말부터 꺼냈다!
아이언사이드 박사는 비록 안수는 받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잉글랜드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세계 최고의 설교자 중 하나로 유명했다. 그는 형제 교회 출신으로 애리조나와 뉴 멕시코 인디언 지역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내가 여태까지 만나 본 사람 중 그처럼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무디 교회에서 열린 YFC 집회 때 그의 옆자리에 앉은 적이 있다. 설교를 맡은 그는 잠이 들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설교 시간이 되어 나는 팔꿈치로 그를 슬쩍 찔렀다. 그는 일어나 성경을 척 펴더니 아무데나 펼쳐진 본문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정말 놀라웠다!"

빌리 그래함이 그토록 극찬한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마태복음에 대한 해설을 살펴보고 천국의 비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아이언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태복음에서 사용되고 있는 천국은 온 세상에 최종적으로 세워지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돌아가신 후로부터 그가 권능과 영광 가운데 다시 오셔서 그의 나라에서 모든 죄악을 뿌리 뽑고 모든 불법을 행한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까지 중간 기간에 그 나라가 취하는 비밀스러운 형태를 가리킨다.” 주님은 이것을 천국의 비밀이라고 불렀다. 천국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는 하늘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에서 사용된 이 천국이라는 말을 온 세상이 왕되시는 예수님께 복종하게 될 때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리키는 말과 혼동해서도 안된다. 이 비유는 이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내내 기독교계에서 만연해왔던 것과 상태, 즉 참되게 믿는 자들과 믿는 자 같으나 실제로는 믿지 않는 자들이 함께 뒤섞여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악한자의 자녀들인 가라지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알곡과 함께 이 천국에 섞여 있다."

천국의 비유 3(마 13:24-30, 36-43/ 31-35)

가라지의 비유
이 두 번째 비유에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처럼 사단이 참된 씨를 빼앗아 가는 대신에 자신의 "거짓된 씨"를 덧뿌렸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마귀는 거짓된 가르침으로 세상을 범람하게 하여, 그 결과로 "마귀의 자녀"들을 생산한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 사단이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25절). 사단과 그의 사자들의 의도는 참된 믿는 이들의 열심과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사단도 가라지라 불리는 거무튀튀하고 흉악하게 생긴 들보리를 심었다. 거짓된 가르침이 어떤 점에서는 진리와 비슷해 보이듯이 들보리도 자랄 때에는 외형적으로 참된 곡식처럼 보인다. 초대 교회의 역사를 보면, 그때에도 우리가 성경에서 경고를 받은 대로 많은 거짓된 가르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게 된다.

주님의 종들이 이러한 가라지들을 뽑기를 구하였을 때, 주님은 가만 두도록 하셨다. 추수 때에 추숫군들이 곡식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해석해주셨다. 38절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 이다. 이 세대의 끝에 천사들이 마귀의 자녀들인 가라지를 뽑아 풀무불, 곧 지옥에 던져 넣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밭을 교회로 해석해서 우리 주님이 여기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교회 안에 함께 있게 될 것을 가르쳤다고 주장하지만, 주님은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교회는 거듭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예배당과 같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있어서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은 여기서 세상에 대해 말씀하시면서(38절), 곡식과 가라지가 교회가 아닌 바로 세상에서 함께 세상 끝까지 있을 것으로 언급하셨다. 이 비유는 교회에 대한 계시를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16장 이전에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아직 제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좋은 씨를 가리켜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이것을 주목하라. ‘천국의 아들’이란 말씀 속에서 우리는 여기서 자녀와 아들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아들이란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인데,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유업을 상속받을 자격을 충분히 갖출 정도로 성숙했다는 뜻이 있다. 따라서 아들이란 단어 속에는 영적인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 담겨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게 된다. 제자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 상태에서 영적인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통해 아들의 상태에 이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만일 우리에게 제자의 삶이 없다면, 성숙도 성장도 없다. 우리가 다만 구원받았다고 자족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과연 제자인가? 지금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주님이 앞서가신 발자취를 좇아가고 있는가?

이제 ‘제자’라고 하는 의미를 살펴보자. 마태복음에서 제자는 단순히 스승이신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지옥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통치하기 위해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의 삶은 곧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왕이 되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왕이신 우리 주님의 인격과 언행심사를 제자의 삶을 통해서 훈련받고 연습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는 날마다 왕의 인격과 형상으로 닮아가는 것이다. 바로 제자의 삶을 통해서 말이다. 당신은 제자인가? 이에 대답할 수가 없는가? 그렇다면 오늘부터 제자의 삶을 시작하시지 않겠는가?

39절에서는 세상 끝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천국 시대의 마지막을 가리킨다. 이것은 곧 대환란이 끝나는 시점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의 때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 이전, 곧 대환란이 시작되기 전에 휴거되어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43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휴거는 사실 30절에서 언급되었다. 우리는 믿는 이들이 악한 자들이 심판을 받기 전에 하늘로 끌어 올려질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에 임하실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어, 변화된 몸으로 함께 임하게 될 것이다(골 3:4). 교회는 이전 세대의 아들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비밀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바로 여기서는 휴거가 직접 언급되지 않았고, 간접적으로 암시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마태가 왕국의 진리를 펼치면서 절정에 이르렀을 때, 천국의 절정(climax)은 휴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에 있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다.

겨자씨의 비유
이제 겨자씨의 비유를 살펴보자. 겨자씨의 비유는 작은 겨자씨 한 알을 통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 멸시받아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사람처럼 - 후에 거대한 나무로 변하게 된 현상을 통해 천국을 설명하고 있다. 겨자씨를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거룩하신 구주께서 취하신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작은 씨가 자라 가지가 많은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이것은 무언가 변형과 기형적인 일이 일어난 것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씨보다 작은 풀과에 속한 식물인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되었다. 식물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겨자식물은 다 자라면 90cm 가량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5-6m 까지 자라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이 비유는 복음을 통한 정상적인 성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겨자나무에 씨앗을 먹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되었다. 성경에서 감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도구인 이스라엘 민족을 모형적으로 나타내는데, 사용된 축복의 나무이다. 그러나 겨자나무는!? 겨자는 맛을 내는데 조미료로 사용되는 식물이다. 이 비유의 교훈은 분명하다. 이 비유는 비정상적이고 엄청난 (양적)성장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공격하는 또다른 사단의 술책을 나타내고 있다.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큰 성 바벨론은 조직화된 종교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배교 체제는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계 18:2). 좋은 씨를 먹어버리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더니, 이제는 체제를 발전시키고 둥지를 튼 것이다. 즉 교회를 박해를 통해 멸절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사단은 이제 전략을 바꾸어서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거듭난 적이 없는)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 입증된 진리이다!

전에는 박해자였던 사단이 이제는 모방자가 된 것이다. (참된 의미에서)기독교가 이제는 기독교계가 되어, 종교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마귀가 천국에서 자기의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이 거대한 나무의 가지에 깃들이게 되었는데, 이 새들은 우리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사단과 그의 천사들이다(4, 19절). 처음에는 천국 안에 참된 믿는 이들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명목상의 교회(professing Church)가 영적인 혼돈과 도덕적인 타락을 조장하여, 하나님의 참된 성도들을 근심케하고 애통하게 하는데, 이는 모든 가증한 일들이 그 가운데서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겨자씨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참뜻이다.

누룩의 비유
마태복음 13장의 여자와 누룩의 비유에 대해 많은 유명한 주석가들이 여자는 교회이며, 누룩은 복음이고, 가루(혹은 음식)은 사람(humanity)을 나타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음식(사람)에 누룩(복음)을 갖다 넣는 것은 복음이 사람 속으로 역사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주석가의 왕자"로 불리는 존 피터 랑게(John Peter Lange) 박사는 자신의 주석책에서 "여자는 교회, 누룩은 복음, 가루 서 말은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이 점진적으로 세상의 생명을 이기게  될 것이다"고 했다. 또 다른 개혁주의 주석가는-후브너(Heubner)- "이 비유는 모든 것에 침투하는 복음의 능력과 그 원리가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흘려진 화목케하는 피에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들을 통해서 천국이 교회라는 해석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후천년설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따라서 건전한 기독교 문화가 온 땅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은 점점 더 좋은 세상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로는 이러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오류적인 해석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한번 거짓된 가르침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해악스러운 것인가를 보게 된다. 그러나 복음이 온 세상에 스며들어 복음이라고 하는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부풀게 하리라는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가르침과 분명히 모순된다. 성경에서 이러한 상징들의 의미를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듯하다. 구약 성경은 분명 누룩을 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이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16:11-12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여기서 누룩은 좋은 것이 아니라, 악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기를,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전 5:6-7)고 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누룩이 없는 경우에만 새 생명이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 즉 가르침을 삼가라. 바리새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치지만, 행치 않는 사람들이다. 외적인 형식은 좋아하지만, 내적인 실제가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으로 반응을 나타내라. 순종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될 수가 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로서,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이성에 맞는 것만 믿는 사람들로, 성경에 나타난 이적과 기적을 믿지 않고, 그것을 다만 하나의 신화로 믿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현세적인 사람들로, 자신들을 지성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다만 예수님을 도덕적인 선생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신학공부를 했던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했다. 그는 우리 주님을 거룩한 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삶을 본받고자 했던 사람이다. 오늘날 ‘역사적인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악한 자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가라지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누룩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이제 주님은 33절에서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용된 음식(가루)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음식은 곡식으로부터 온 것으로 가라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곡식은 좋은 씨이다. 음식은 좋은 것의 상징이지 사람에 대한 상징이 아니다. 사람 속에는 좋은 것이 없다.
레위기 2장 11절에 보면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에 누룩을 넣지 말도록 말씀하고 있다. 창세기 18:6-7에서 아브라함은 주님께 좋은 것으로 드리고, 주님으로부터 은혜 얻기를 구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떡을  만들고,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했다. 세 스아(서 말)로 만든 음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이 비유에서 가루 서 말은 주님의 사역 혹은 깨끗하고 더럽지 아니한 말씀을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자는 누구인가? 과연 이 여자가 교회을 가리키는가?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하신 말씀에서 이 비유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되는데, 이 여자는 이세벨로서 교회가 아니라, 명목상 기독교라 불리는 거대한 세상적인 종교 조직을 말한다(계 2:18-29).
이제 다시 누룩의 비유를 살펴보자. "천국(기독교계)은 마치 여자(거대한 종교 조직)가 가루 서 말(그리스도께서 심으신 말씀)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스며들게) 한 누룩(악한 가르침)과 같으니라". 이것이야말로 주 예수님의 가르치신 바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사단의 악한 가르침과 현대 사상의 악한 영향에 의해,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복음의 순수성이 변질되고, 또한 교묘한 방법으로 좋은 것(성경의 바른 교훈, 딤전 6:3 참조)이 공격을 받는 것을 경험해오지 않았는가?
누룩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 5:7-8) 그러므로 우리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의 삶을 연습하고, 훈련하며 살자.

우리는 이상의 비유를 통해서 이 세상은 많은 거짓된 가르침이 난무하고 있고, 이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혼란케 하고, 또 이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진리에 대하여 무디게 하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때로 갈수록 진리를 떠나고, 배도하는 일이 더욱 많아진다는 사실도 보았다. 또 이를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천국의 아들들이신 여러분들이여, 이러한 때일수록 주님을 바라보자. 주님의 영광스러운 다시 오심을 앙망하자. 그리고 오직 오늘이라고 불리는 이 때, 제자로서의 삶을 충성스럽게 살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자. 이렇게 행하는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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