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칼럼]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2)

이종수 | 2004.11.29 16:51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2)
The Church, the House of God

부제: 교회 안에서의 합당한 섬김을 위한 사역 관계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딤후 2:2)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집의 법도가 세대를 이어 계속 되어야함을 의미합니다. 저는 하나님 집의 법도란 말을 보다 성경적인 의미인 ‘신약 교회의 원리’로 부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신약 시대인 오늘날 신약 교회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집의 법도가 계속해서 전수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시대에는 이러한 신약교회의 원리를 통칭하여 ‘사도의 가르침’으로 불렀으며, 이것은 사도들이 각처의 각 교회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중요한 진리였습니다(행 2:42, 고전 4:17 참조).

그런데 디모데전서 1장 3-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도록 경계의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인 신약 교회에 ‘신약 교회의 원리’가 아닌 다른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교회의 원리는 단순히 교리적인 차원을 넘어 그 실행면에 있어서도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좇아야 할 시금석과도 같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신약 교회의 원리를 힘써 배우고, 또한 실천하기 보다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는 일에 빠지게 되었고,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일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 인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을 저버리게 되었고, 헛된 말에 빠져 높은 마음을 품게 되었고, 또한 율법의 선생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는 곧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0장 30절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미리 말한바,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또는 다른 교훈)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났음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로 인해 에베소 교회는 혼란에 빠지고,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무질서의 온상이 될 위기에 처한 듯이 보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약교회의 원리를 떠나 다른 교훈을 좇는 현상들을 무수히 보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신약교회의 원리를 떠나 자신의 기호나 또는 선호를 따라 교회를 세우고, 성경이 아닌 인간이 만든 원칙이나, 또는 헌법에 따라 교회를 운영, 또는 경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으로 암흑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까요? 하나님의 집에서 신실하게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자 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신약 교회의 원리를 우리가 섬기고 있는 지역 교회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집에서 “합당한 섬김을 위한 사역 관계”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일군들이 어떻게 세워지며, 또 세움을 입은 일군들은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그리고 함께 일군된 동역자들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떻게 일군이 세워지는가
성경은 또한 교회를 성령님의 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성령님께서 교회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성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스스로 인간 지도자를 앞세워 교회의 모든 일을 맡기고 주관하게 하며, 자신은 스스로 영적인 실업자의 자리에 앉아 있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일군(감독, 장로)을 세우시는 것은 성령님의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이며(행 20:17-28 참조), 또한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높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집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섬길 때에 하나님의 집에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 한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13장 2절을 보면,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님이 특별한 사역을 위해 바나바와 사울을 세울 것을 명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은 이미 그 인격과 충성됨이 입증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이 두 사람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성되지 않은 사람을 세우시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작은 일부터 충성할 때, 하나님은 그 충성됨을 보시고 큰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일군들을 세우실 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충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을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맡은 일에 잠잠히 충성할 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며, 또한 어떠한 일에 충성해야 할까요? 이 점에 있어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사도행전 11장 24-30절을 보면, 바나바는 그 마음이 착한 사람으로, 또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바나바를 이렇게 훌륭한 인격과 신앙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묵상함으로써 시편 1편에 소개된 복 있는 사람처럼, 인격이 변화를 받고, 그 믿음이 담대해지고, 또한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롬 10:17, 골 3:16). 또한 사울은 사도행전 9장에서 구원을 받고 담대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명하고 전파하면서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지만, 잠시 사역의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리곤 형제들에 의해 다소로 보내졌는데, 이는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깊이 연구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행 9:1-30, 11:25-26 참조).

그러므로 바나바와 바울의 훌륭한 인격과 신앙을 본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첫 번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또한 순종하는 일에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거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8:31 참조). 두 번째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군이 되고자 하는 마음의 목적과 동기는 첫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 번째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주님의 일은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훌륭하고,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이는 그 일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충성되어 여겨 이 고상한 직분으로 부르셨습니다(딤전 1:12 참조). 맡겨진 일이 무엇이든, 그것이 주일학교 교사이든, 학생회, 청년회 교사이든, 또는 집사, 구역회 책임자이든 그 일을 부지런히, 또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최선으로 섬길 때,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롬 14:18)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최선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자연스럽게 성도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됩니다. 디모데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행 16:1-2) 따라서 우리의 충성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도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면 성령님은 우리를 교회의 일군으로 쓰시게 될 것입니다(딤전 1:12, 골 1:24,25).

2. 앞선 일군들과의 후임 일군들과의 관계
우리는 앞선 일군들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아마도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후임 일군인 디모데를 친 아들과 같이 대해 주었고(딤전 1:2 참조), 디모데는 사도 바울을 마치 친아버지와 같이 존경하며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다음과 같이 칭찬해주었습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22)
이처럼 앞선 일군들과 후임 일군들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저는 ‘멘토링 관계(Mentoring)’라 부르고자 합니다. 멘토링 관계란 앞선 일군들은 후임 일군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돕고, 후임 일군들은 앞선 일군들의 본을 좇아서 배우는 관계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멘토링 관계에 대한 많은 예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엘리 제사장과 어린 사무엘의 경우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그 말년에 분별이 흐려지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 집에 심판을 초래한 사람이지만,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알려준 사람입니다(삼상 3장 참조). 하나님은 사무엘이 충실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좇아 섬길 것을 미리 아시고(삼상 2:35), 사무엘을 택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무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자신의 멘토였던 엘리 제사장을 통해 배워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멘토링 관계를 통해 일군들을 예비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다른 멘토링 관계의 사례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멘토였던 엘리야를 신실히 좇으며, 떠나지 아니함으로 아름다운 동행을 통해 열심히 배웠습니다. 마침내 엘리사는 엘리야와 같이 되고픈 소원을 가지고, 엘리야의 영감의 갑절을 구함으로써(왕하 2:1-15 참조) 자신의 스승과 같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로 볼 때, 멘토링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집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멘토링의 역사가 불일 듯 일어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3. 함께 일군된 동역자와의 관계
우리는 또한 함께 일군된 동역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함께 일군된 동역자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함께 서면 동반자이지만, 서로 경쟁의 관계에 들어서면 덕스럽지 못한 관계가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불편하게 만들게 됩니다. 동역자들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은 은사의 차이로 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의 은사를 존중하고 서로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결국 분별의 차이로 인해 교회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동역자들 사이에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빌 2:3)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갈렙과 여호수아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민수기 14장 24절과 신명기 1장 36절을 보면 갈렙은 여호수아보다 앞선 일군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지나는 거의 40여년 동안, 갈렙의 이름은 여호수아 보다 항상 앞섰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인도자로 세움을 입은 사람은 여호수아였습니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서로 어떠한 갈등도 나타내지 아니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인격을 갖춘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이었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선택을 합당하게 여겼고, 여호수아를 하나님이 자기 위에 세운 사람으로 기꺼이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신실하게 동역을 해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존경스러운 일인가요!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이 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참으로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4. 새로 영접된 성도의 경우
하나님의 집인 지역교회에 다른 교회에서 섬기던 신자들이 영접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경우에는 다른 복음적인 교회에서 모임에 더해진 경우나, 다른 모임에서 천거해온 경우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해야 하며, 하나님의 집에서 섬길 수 있도록 배려해주어야 합니다. 거듭난 모든 사람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을 섬기는 것은 그의 고유한 특권이자 또한 의무이기 때문에, 이 분들이 자신의 은사를 따라 섬길 수 있도록 최선의 배려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적인 가르침이나 강단을 사용하는 일에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교회가 혼란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쉽게 간증을 하도록 부탁하면서 강단을 사용하도록 할 수가 있는데, 이 일에도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간증을 부탁받은 성도가 간증 대신에 가르침을 베푸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또 강단을 쉽게 허용하는 경우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에 기회를 제공할 수가 있습니다. 어린 성도나, 또는 믿은 지 오래된 성도일지라도 바른 가르침(교리)에 대한 분별이 없을 경우, 이러한 이상한 가르침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
또 한편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새로 영접된 성도 자신이 교만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이든지 새로 영접된 성도가 강단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칫 높은 마음을 가질 수 있기에,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일찍 만개한 꽃을 보려다가 아직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를 억지로 잡아 뜯는 일이 되어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좋은 방법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 가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새로 천거해온 성도가 과연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지, 또 인격 면에서는 어떠한지, 과연 그 인간됨이 충성스러운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전 교회에서 어떻게 섬겼는지를 참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시험하여 보고 책망할 것이 없으면 그 후에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좋은 길입니다.

5. 교회 학교와 친교 모임의 일군을 세우는 문제
또 달리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회, 청년회 등 교회 학교와 청장년회, 중년회, 장년회 등 친교 모임 등에서 일군을 세우는 일입니다. 어떤 형태이든지 교회에서 일군을 세우는 이 모든 일에 교회를 목양하는 장로(목자, 감독) 형제님들과 함께 의논하고, 또한 기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교회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어떤 교회에는 주일학교, 학생회, 청년회 등의 교사를 세우는 일에 장로 형제님들과 의논 없이 일을 부탁하거나 맡기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본인이 주님 앞에서 책임감을 갖는 부분이 약해지기 때문에, 경홀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쉽게 시작했다가 쉽게 그만두는 일이 왕왕 생길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군들이 교회에서 공적으로 세워질 때, 성도들은 누가 일군인지를 알고 함께하는 마음으로 그 성도를 위해 기도로 도울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일군으로 세워진 본인도 미천한 자신에게 주의 일을 맡기신 일에 감격하여 주님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일을 감당하게 되고, 어려운 일이나 시험이 올 때에도 교회에 기도를 부탁하며,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게 됩니다. 이를 통해 일군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딤전 3:13 참조). 따라서 모든 일군들을 세우는 일에는 원칙적으로 장로 형제님들을 통해 공적으로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게 될 것입니다(빌 2:14).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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