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묵상] 굳게 잡으라

이종수 | 2004.11.16 11:17
굳게 잡으라
Hold Fast!

굳게 붙들어야 할 일곱 가지 중요한 진리

-HY 피커링

“굳게 잡으라”는 구절은 성경에서 12번 등장하고 있으며, 특히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주신 메시지 가운데 세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이 말은 오래도록, 강하게, 영구적으로 붙잡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날은 어둡고, 길은 어렵기 그지없지만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2) “지키어 회개하라(굳게 잡고 또한 회개하라: 원문 직역)”(계 3:3). 마음이 낙심되는 쪽으로 점점 기울고 믿음 안에서 걷는 걸음도 더디거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회개함으로 굳게 잡으라. (3)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계 3:11). 즉 우리는 굳게 잡을만한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우수함과 가치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잃지 않도록 굳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저는 시대가 어두워질수록 우리 모두가 더욱 더 굳게 잡아야 할,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곱 가지 성경 진리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복음 (The Gospel)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1-4).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에 대한 “복음”이 공공건물이나, 임대한 넓은 회관, 또는 길모퉁이, 그리고 각 집의 문을 두드리며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되던 때가 있었지만, 그와 같은 시절은 지나간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난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은혜보다는 율법이 더 전파되면서, 황량한 율법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옛 복음으로의 회복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앉든지 걷든지, 또는 일어서 있든지” 상관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셨고,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증거되었던 복음 메시지는 매우 쉽고도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저(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것이었습니다.

1859년 부흥의 시기 이래로, 리차드 위버(Richard Weaver)의 시대와 무디(Moody)와 생키(Sankey)의 설교 시대에, 이러한 메시지는 너무나도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에 50년 전 사람들 중 100여 년 전 암흑시대가 과연 어떠했는지를 실감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우리가 “복음” 듣기를 기대하는 곳에서조차도 우리 주님의 죽으심, 장사지낸바 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듣기가 얼마나 힘든지요! 도덕과 윤리에 관한 설교, 시사 평론적인 설교, 지나치다싶을 정도의 세세한 성경 해설, 예언에만 중점을 둔 설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주제 설교 등은 다루어지지만 단순하면서도 기쁨을 주는 영광스러운 복음은 좀처럼 선포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부활하셔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히 7:25)신 주 예수님의 복음을 굳게 잡으라고 강권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확신(Assurance)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3). 초대 교회 시대에 성도들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요 3:36)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눅 10:20) 것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또한 자신들이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그리스도께서)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딤후 1:12)했습니다.
그 당시 복음은 “큰 확신”(살전 1:5) 가운데 이르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랑은 식어지고 진리는 희미해지기 시작했으며 많은 이들이 확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요한 웨슬리의 시대까지 지속되다가, 그 이후로 참된 하나님의 자녀도 타락할 수 있으며,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될 수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교회에서 신비주의적인 칼빈주의가 들어오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해로운 교리가 가르쳐지고, 그 외에도 다양한 다른 교훈들과 이론들이 가르쳐짐으로 인해, 오늘날 무수히 많은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행복한 분깃인 “복된 확신”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는 사도 요한의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말씀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이며 따라서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귀중한 진리를 굳게 잡도록 항상 서로를 권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영감 (Inspiration)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이 마지막 시대에 심각한 신학적인 논쟁 중 하나는 지금까지 계속 싸워온 것으로, 바로 성경이 무오한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이라고 부르는 책은 -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되었다는 전제 하에서 - 과연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아니면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화나 신화, 전설이나 민간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에 진리의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는 책일까요?
만일 전자가 맞는다면 우리는 성경을 더욱 많이 읽어야 하며,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며, 또한 가치 있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후자가 옳다면 성경과 함께 그 모든 가르침을 가능한 대로 속히 난로 속에 던져 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몇몇 주요 교단의 유명한 지도자들이 성경의 영감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과 또 다른 사람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롬 4:3)라는 원래 기준과는 다른 기준을 도입하였던 것입니다.
약 180년 전, 한 무리의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그 마음이 감동되어, 많은 기도와 말씀 묵상 후 모든 신경, 신앙고백, 교리문답 등 인간이 작성한 일체의 규정들을 버리고, 그들의 완전하고 유일한 삶의 규칙이자 진리의 기준으로,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 및 교회와 세상에 관련된 모든 일들의 지침서로 “성경, 신구약 성경 전체, 오로지 성경”만을 취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성경의 영감을 믿었던 그들은 오직 성경만이 사람을 “거듭 나게”(벧전 1:23)하며, 어린 신자들을 성장하도록(벧전 2:2) 할 수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노인이나 청년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신자들을 성결하게 하는데 성경만한 책이 없으며(요 15:3), 또한 성경은 우리를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건축하며” 세우도록 해줍니다. 이 단락의 첫 부분에서 인용했듯이(딤후 3:17) 성경은 우리를 온전함의 최고 높은 고지로 인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따라서 나이가 많든 적든 참된 신자들로 하여금 “영영히 서리라”(사 40:8)는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고도 축어적으로 영감되었다는 성경의 진리를 굳게 잡도록 권할 필요가 오늘날보다 더 요구되던 때는 없었습니다.

모으는 이름(The Gathering Name)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우리를 모으는 이 이름은 위대한 교회 서신인 고린도전후서의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교회의 하나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이 연결 고리는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그러나 놀랍게도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 유일한 이름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만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번역하면 베드로라)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전 1:12)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일반화되어, 지금은 온 세계에 걸쳐 수백 개의 커다란 교단 및 수많은 작은 교파들의 목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3장 4절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너희가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냐?: 원문 직역)”
그렇다면 치료책은 무엇일까요? 초대 교회로 돌아가서 모든 종파, 교파, 분당, 어떤 사람의 이름을 좇는 것을 제하고, 다른 아무 이름도 취하지 않고 오로지 귀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모임으로써 유일한  “한 몸”(엡 4:4)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딤후 2:22)과 함께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복음”(갈 1:8)으로 세계를 복음화 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한 소망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딛 2:13)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큰 교회에서 이러한 진리들을 설교하자, 한 여성이 내게 다가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속한 교회는 무슨 교회인가요?”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속한 교회와 같은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오, 그렇다면 그 사도 바울이란 분은 어느 교회에 속해 있었나요?” “제가 속한 교회와 같은 교회에 속하시지요. 곧 성경이 보증하고 있는 유일한 교회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를 가진 교회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와 같은 교회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다음 세 가지 특징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무리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 그들은 세상과 그 길에서 분리되어 있다. 2)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다. 3) 그들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조직이 아닌) 기능하며, 목자, 교사, 복음 전하는 자, 그리고 부활하신 머리이신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 교회를 찾거든 그 옛날 사도와 같이 그들과 “함께 있어”(행 9:28) 진정한 동역자로 섬기십시오.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직분(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벧전 2:5, 9).
제사장으로 세우는 일은, 우리가 에베소서 4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활하신 머리이신 주님에 의해 된 일입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8-11). 그들은 무엇을 위해 선물을 받은 것일까요?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엡 4:12)이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얼마나 지속되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성직자와 평신도” 같은 구분은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으며, 초대 교회에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므로, 오늘날에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모든 참된 신자는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사람은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자들은 “저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1:7, 2:18)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진정한 제사장, 또는 성직자는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임명하시며 세우신 영적인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므로 인간 중보자가 필요치 않으며(히 7:25, 8:1),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10:19).
현재 우리에게 있는 “사제” 또는 “성직자” 제도에는 두 가지 악이 있는데, 그 하나는 한 사람에게만 모든 것을 집중함으로써 성령님께서 주신 모든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데 있고, 다른 하나는 검증받지 않은 사람, 때로는 부적절하며 심지어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성직자라는 직분에 임명하는 것입니다.

C. H. 스펄젼(C. H. Spurgeon)이 잘 말한 것처럼 “지난 50년간 평생 복음을 전하며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 경건한 할아버지는 그냥 존 스미스 ‘씨’로 불린데 반해, 대학에 가서 몇 가지 언어를 겉할기 식으로 배우고 신학을 덩어리 채 공부한, 경험 없고 온유한 성품을 갖지 못한 버릇없는 손자는 존 스미스 ‘목사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의 이름 앞에 “지존하신(Reverend: 오늘날 일반적으로 목사의 의미로 사용함)”이란 칭호를 두는 것은 “전능자”란 칭호를 사람에게 쓰는 것과 같이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두 칭호는 모두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신(Holy and reverend is His Name)”(시 111:9)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신자는 제사장, 곧 성직자”라는 사실을 “굳게 잡아” 성직에 관련된 칭호들을 모두 합당한 자리로 돌려보내고 - 잊어 버리고 -,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히 8:1)다는 진리 안에서 더욱 더 영광을 돌리도록 합시다.

하나님께로의 분리 (Separation unto God)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4-17).
오늘날 기독교 영역에서는, 즉 대부분의 교단 교회에서는(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원 받은 자와 구원 받지 않은 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빛과 어두움, 성도와 불신자들이 절망스럽게도 서로 섞여 있습니다.
기독교계는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인 혼합체를 이루면서, 양조자들, 증류주 제조업자들, 선술집 주인들, 내기꾼들, 연극 배우들, 도박꾼들과 바람잡이들, 공산주의자들, 신지학자들, 그리고 누구든지 소위 “교회의 교제(Church Fellowship)”라고 불리는 것에 가담하길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서로 결탁하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의 목사인 보나르 박사(Dr. Bonar)는 다음과 같은 진실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교회를 찾으니, 교회가 세상 속에 있었고, 세상을 찾으니 세상이 교회 속에 있었다.”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들은 (1) 세상과 분리되어야 하고(요 15:19, 히 7:26, 요일 2:16), (2)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과 분리되어야 하며(살후 3:6), (3)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모든 자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요이 9-10, 딛 2:7), (4) 고린도전서 5:11, 13절에 언급된 죄들을 짓는 자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5) 하나님께로 분리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시 4:3)
신앙 안에서 건전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동료 신자들로부터의 분리는 신약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가 아닙니다. 오늘날 몇몇 사람들이 더욱 경건한 척 행세함으로써 스스로 분리하거나, 또는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는 식으로 상대방에게 스티커(seal)를 붙이는 것과 같은 성도간의 분리는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는”(시 68:6)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입니다.
타협의 시대인 오늘날,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대한 불충성으로 점철되고,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방종으로 가득한 오늘날과 같은 시대만큼이나 나와서 따로 있으라고 부르시는 나팔소리가 더 절실히 필요했던 때는 결코 없었습니다.

주의 재림(The Coming of the Lord)
구주께서 친히 “내가 다시 와서…”(요 1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이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주께서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라는 특별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의 재림이라고 하는 주제가 성경의 다른 그 어떤 주제들보다 더 남용되어 온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 주제는 적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동료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무시당해 왔습니다. 재림의 날짜를 정하는 사람들은 해, 날, 절기 및 기타 방법들을 통해 날을 계산했으며, 그렇게 주님이 재림하시는 연도를 정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날이 지나갔음에도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혐오와 미움만 받았습니다. 자극적인 제목과 차트 및 그림들을 앞세운 저 유명한 강사들은 잘못된 흥미만 유발시켰으며, 이 역시 결국에는 이 주제 자체에 대한 혐오와 무시만을 가져왔습니다. 거짓 교사들과 협잡꾼들은 주의 재림을 이용해 그들의 추종자들로부터 돈을 긁어모았으며, 혹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들을 꼭대기에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충성된 성도, 혹은 선택받은 성도만 휴거되고, 충성되지 못한 성도는 환난을 통과하면서, 형벌, 혹은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부분 휴거설이 등장함으로써, 성도들의 마음을 낙심케 하고, 팔을 축 늘어뜨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토록 밝게 타오르게 하고, 그토록 영웅적인 삶을 살게 하며,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헌신을 자아냈던 그 빛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고, 끔찍스러운 무관심이 교회와 세상에 덮고 있으며, 그처럼 “복된 소망”이 서서히 베일에 가려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 그 머리를 떨구셨던 그분이, 그러나 이제 하늘의 보좌에 앉아계신 그분이 그 보좌에서 일어나 구름 가운데 강림하실 것이며, 큰 호령을 발하심으로 참으로 거듭난 모든 자들(요 3:5-7)과 죽어 있던 자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살아있던 성도들을 자기와 같은 형상으로 변케 하실 것이며(고전 15:51, 롬 8:29), 하나님의 나팔을 부심으로써 참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땅으로부터 공중으로 끌어올려 주를 뵙게 하실 것이며, 마침내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재림의 시기, 재림의 방법, 재림의 결과, 또는 재림 이전과 이후의 사건들 등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의견차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마음이 나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영광스런 그리스도, 곧 갈보리에서 승리하신 승리자께서 다시 오신다는 진리를 굳게 붙드십시다. 그 날에 주님은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벧전 4:13),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살후 1:10), 하나님의 광대하신 우주를 통틀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천군천사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실 것입니다(계 5:12). 그 날에 주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딤전 2:2, 계 17:14, 19:16)로서 왕관을 쓰실 것이며, 또한 모든 무릎이 그분 앞에 꿇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오, 내 영혼아, 이제 일깨어 이렇게 반응하도록 하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나는 그분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네.
문턱을 밟는 그분의 발소리를.
내 심장, 나의 영혼은 갈망하네.
그분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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