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통성과 침묵(通聲과 沈默)

서중한 | 2003.09.25 07:10
   들어서는 말

   '통성'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말이다. 짧은 한국 교회사에서 우리의 것으로 이토록 빨리 정착된 것이 있을까. 이런 연유로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통성을 주요한 기도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흥회나 기도원을 다녀오면 으레 걸걸한 쉰 목소리가 나야 은혜 받은 것으로 간주하였고 부흥사가 되기 위해 탁성(濁聲)을 연마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통성 때문에 쉬어버린 목소리가 은혜의 징표(?)로 여겨졌던 것이다. 나는 그런 모습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기도에 관한 잘못된 생각이 빚은 결과이지만 이런 행태들은 통성이라는 기도의 방법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깊은 연관이 있다. 학문이나 삶이나 늘 어떤 방법을 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유일한 것으로 여길 경우 더욱 그렇다. 통성이 기도방법의 유일한 것 혹은 그 주된 것으로 인식 될 때 통성기도의 특질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도를 신앙의 들숨과 날숨으로 생각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기도를 어떤 방법으로 드리며, 그 기도를 어떻게 인식하는 가는 신앙의 중요한 틀을 이루게 한다. 생각해 보면 한국교회 교인들의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인식, 곧 내 뜻과 소원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서의 기도인식은 통성으로 일관된 우리의 기도방법과 깊게 연결되어있다. 나는 통성의 역사가 정리되고 새롭게 되새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통성일변으로 달려온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일이며, 참으로 깊은 기도의 세계를 열어 가는 중요한 첫발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통성으로 기도한다. 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운 이후부터 지금까지 통성과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왔다.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도 모든 기도는 통성으로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늘 통성으로 기도하면서 복잡한 질문에 빠진다. 통성기도가 과연 내 마음을 가장 진실되게 아뢰는 기도의 방법인지. 내 생각과 말이 겉돌고 있지는 않은지. 점점 빨라지는 말의 속도로 스스로를 흥분시키고 있지 않은지 하는 것들이다. 쟈크 엘룰이 말하는 '기도의 유사품'에 대한 염려이다.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는 주님의 은밀하고도 장엄한 임재를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내는 심리 현상과 혼동하는 그런 '기도의 유사품' 말이다. 여기에서 통성을 종교현상이나 종교심리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비평하거나 판단하려는 것은 아니다. 교회 현장에 있는 목사로서 통성을 한국교회의 좋은 유산이라 생각하고 그 유산이 우리 신앙에 미친 영향들을 살펴보려는 의도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의 통성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무엇보다 빨리 우리의 것으로 정착하여 한국교회와 함께 한 통성을 들여다보면 우리 신앙의 중요한 단면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우리의 목회적 심성과 함께 달려온 지난 세월을 만나게 될 것이다.


     '통성'의 출생과 성장

     한국에서 예배가 형성되던 시기를 1870-1900년으로 잡는데 이 기간에 선교사들에 의해 전통 종교와 문화 속에 소개된 예배는 주로 회심자들을 얻기 위한 19세기 미국식 부흥회 형식으로 선교에 초점한 비예전적 예배였다. 예배시 선교사들은 열심있는 기도를 강조하였고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큰 소리로 기도하도록 하였다. 이런 예배와 기도의 분위기는 1907년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적인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통성기도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부흥운동 당시 외국 선교사들과 길선주, 정춘수, 전계은 등이 가세한 평양과 원산의 기도 열기는 여러 증빙자료를 보면 감동의 격류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한말 비운의 역사를 바라보았던 기독교인들의 아픈 가슴은 자신을 통회하고 성찰하는 모습으로 터져 나왔고 죄로 오염된 자신의 영혼은 민족의 운명에 투영되었다.
    통성은 通聲 혹은 痛聲으로 쓸 수 있는데 각기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신비롭게 조화되며 하나의 소리가 되어 그 여운을 남긴다는 뜻에서 通하는 소리요, 죄에 대한 자복과 암울한 민족의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인해 痛하는 소리였다. 通이든 痛이든 그것은 인간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비음(悲音)이라 말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와 관련하자면 저마다의 痛이 通이 되어 드려졌던 기도가 통성기도였다. 通聲은 함께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이었고 절망과 분노를 기도의 채널을 통하여 삭히는 일이었다. 퍽퍽한 세상살이에서 만난 그 분 앞에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더욱 심하게 소리질러야 했던 부르짖음이었다. 이후 통성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기도형태로 자리잡았다. 7-80년대 경제개발과 교회부흥의 시대를 거치면서 통성은 그 위치를 더욱 굳건히 하였고 특히 보수 교단에서는 주된 기도형태로 자리잡았다. 이렇게 한국교회에서 통성이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단시간 내에 괄목할 만한 부흥을 이끌어낸 한국교회의 현실과 맞물려 있다. 어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부르짖는 통성은 빠른 부흥을 이루는데 적합한 기도의 형태였다. 통성기도는 그 어떤 기도의 방법보다 간청기도(heartfelt supplication)에 적합해서 마음의 소원과 열정을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통성은 성장과 부흥의 시대에 걸맞는 기도형태였다. 통성의 시작은 어느 정도 민족적, 시대적 상황을 담고 있었지만 이후 통성은 부흥과 성장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왜 통성뿐인가.

    1984년 이후로 한국에 들어온 서국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의 청교도 전통과 부흥운동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으므로 통성기도는 아니었지만 열정적인 기도를 강조하였다. 선교사들이 소개한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와 기도, 찬송은 전통적 예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선교정책에 의해 보다 자유롭게 구성된 형태였다. 이 말은 한국교회가 전통적인 예전이나 기도의 다양한 방법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음을 뜻한다.
    음성기도(vocal prayer)인 통성기도의 거센 바람 앞에 신앙의 좋은 유산이었던 관상(觀想, contemplation)기도나 묵상(meditation)기도는 한국개신교에 소개되지 못했다. 관상기도는 침묵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침묵과 묵상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간단히 말해 묵상(默想)은 상(想)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묵(默)을 방편으로 삼는 것이고 침묵(沈默)은 상(想)이 없는 침묵을 말한다. 하지만 둘은 음성기도와는 다르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침묵은 말과 소리를 떠나는 순례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사막교부들은 "나는 말을 잊어버린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고 사막을 향하면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사람을 떠난다"고 하였다. 침묵은 단순히 말의 중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말을 향해 떠나는 여행이다. 한국교회는 이 여행의 방법을 배울만한 시간이 없었다. 기도의 방법은 참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기도방법이든 그것은 기도의 본질에 대한 실천적 고민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 속에서 관상과 묵상을 강조한 것은 하나님 존전에 내 입을 닫고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 분과 교제하는 사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앞선 기도의 선배들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살피고 거기에 적합한 기도의 형태를 만들어 실천하였다. 자신의 간청을 소리로 아뢰는 시간이 있었다면 말과 생각을 중지하고 침묵 속에서 자신의 말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그것은 참된 실체되신 하나님을 응시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응시는 그 분과의 기쁜 연합으로 이어졌다. 우리의 침묵의 상실은 이 땅에서의 통성의 출생,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

     '통성'이 채울 수 없는 자리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주일예배까지 '소리'없이 기도할 수 없는 기도의 체질이 굳어진 교회들을 본다. 묵상이라고 적혀 있는 예배 순서마저도 마이크를 통하여 사회자의 중얼거리는 기도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곧 교인들도 입을 열어 함께 중얼거린다. 흔히 볼 수 있는 예배모습이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고, 어떤 소리든 들리지 않으면 불안한 현대인의 심리가 예배를 통하여 그대로 나타난다. 어느 날 몇 몇 집사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다가 시간이 끝날 무렵 말씀을 생각하며 5분간 침묵하자고 말했다. 그들은 5분이 지난 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을 털어놓았다. 입을 열어 무언가 아뢰어야 하는 시간을 침묵, 즉 듣는 상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자신들에게 낯설었던 것이다. 아이든 어른이든 이제 침묵이 어색하게 되었고 침묵의 울림을 듣기에는 우리의 귀가 고음(高音)으로 익숙해졌다. 설교도 TV 프로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우리를 고음에 시달리게 하지만 이내 우리 귀는 고음에 천연덕스럽게 길들여졌다. 소리에 길든 사람들은 소리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래서 '소리'로 확인될 수 있는 통성은 침묵보다 현대인들에게 더 친숙하다. 그런 의미에서 통성의 역사는 쉽게 중단되지 않을 것이며 속도 전에 가열찬 투쟁 의지를 보이는 현대 기술문명과 함께 더 융숭한 세월을 보낼 지도 모를 일이다.
     몇 해전 유명한 젊은 목사가 자신의 책에서 나는 세 시간씩 기도한다고 밝혔다. 내가 세 시간씩 기도하니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별일 아닐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기의 독서시간, 기도시간 등을 당당히 말하면서 성공시대의 비법을 알려주는 젊다기 보다 어린 목사의 당찬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속으로 약간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는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는데 '나는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한다'고 하면 '나는 하루에 3시간 쉼 쉬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꼴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기도의 깊이에 다가서지 못하고 기도마저 수량화시키는 목회자들의 바닥 난 영성을 보는 듯 했다. 통성기도, 즉 말하고 들리는 기도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도의 수량화를 부채질한 것은 아닌지. 역사를 거슬러 한 두사람의 영성가만 만나더라도 그들의 기도 앞에 내 입을 닫게 될 것인데. 시간을 넘어 기도의 깊이에 침잠 되는 말없는 기도의 대가들, 소리 없는 기도의 사람들이 오늘도 어느 바위 밑에서 숨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신학교육을 위하여 보다 훌륭한 환경이 수도원이었던 때가 있었다. 거기서는 말이 침묵에서 나오고 사람을 보다 깊이 침묵 속으로 이끌어 자신이 왜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지, 어떻게 '거룩한 헌신'을 이행할지를 생각했다. 자본시장의 '경쟁판'에 뛰어 든 듯한 신학교에서 이 침묵을 찾을 수 있을까. 침묵을 배우지 못한 성직자들에게 침묵하는 교회를 기대할 수 있을까. 신학교에서도 사라진 침묵을 일반 평신도들에게 권하는 것은 무리한 일일지도 모른다. 통성으로만 채울 수 없는 기도의 자리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침묵이다. 내가 소리내었던 기도가 혹시 그 분의 뜻을 거스린 것은 아닌지, 단지 내 진한 감정을 쏟아 낸 것은 아닌지 침묵 속에서 다시 자기를 둘러보아야 한다.
    나는 새벽 기도를 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라 스스로 깜짝 놀랄 때도 있고 기계적으로 입에 익숙한 말들을 쏟아 놓을 때도 있다. 알지도 못하는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는 나를 본다. 그럴 때면 새벽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조용히 앉아 그저 그 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 분의 사랑에 빠져들고 싶지만 통성기도에 익숙한 교회에서 기도시간에 부목사가 입을 닫고 앉아 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상황을 나름대로 극복하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내뱉는 말들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려고 애를 쓰지만 말을 넘어 설수 없는 기도는 서글프기만 하다. 통성이 침묵이 되고 침묵이 통성이 되는 말과 침묵의 참된 코이노니아가 없이는 통성은 "단조롭게 쏟아져 나오는 말의 홍수, 똑같은 말과 똑같은 탄성의 반복, 진부한 말에 지나지 않는 방언과 비슷한 말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자신에게 진정한 기도의 영이 없다는 사실을 위장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질책을 면키 어렵다.
  
     통성과 간청기도

     통성은 우리나라의 역사적 정황과 맞물려 독특하게 형성되었고 또한 우리 내면에 통성의 욕망이 있다는 점에서 통성기도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행해지는 통성 일색의 기도는 기도의 본질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한나의 슬픈 기도소리와 시편 시인들의 부르짖음을 듣는다. 선지자들의 절규와 욥의 외침을 듣는다. 그것은 한국교회처럼 집단적인 通聲은 아닐지라도 한 개인의 痛聲이었다. 가시에 찔리면 순간 비명을 지르듯,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면 나도 몰래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듯 기도의 세계에 고통의 소리가 왜 없겠는가. 그런데 그런 통성이 기도의 변함 없는 방법으로 사용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기도가 마치 자신의 바램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 것으로만 여겨진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간청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기도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기도를 간청의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한국교회 교인들의 사고 중심에는 통성이 놓여있다. 박은규 교수는 한국교회 교인들의 기도의 문제점을 설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한국인 신도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있으나 그들의 기도 생활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그들의 이기심이다." 바로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이다. 말이 쉼 없이 이어지는 통성은 그 만큼 남을 돌아볼 시간이 적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간청하지 않으면 내가 기도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침묵이 기도의 중요한 방법으로 교회에서 상실되지 않았다면 이토록 우리의 기도가 자기 생각만을  밀어붙이는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려는 욕구가 기도의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욕구가 실현된 것이 반드시 기도가 응답된 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바램으로 시작된 기도자의 마음이 그 바램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때, 그 때 기도는 우리 심령 가운데서 살아온다. 바램으로부터의 자유는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에게로 옮겨졌음을 말하며 이것이 기도응답이요,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우리가 기도를 관계나 사귐의 의미로 바라보았더라면 통성이 기도의 세계를 이렇게 온통 잠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간청기도가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간청기도가 전부이며 그 간청기도에 통성이 사용될 때 발생되는 부작용을 지적하는 것이다. 기도가 간청에 집중하게 될 때 반드시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된다. 헨리 나웬은 "우리가 기도에 초대될 때, 꽉 움켜쥔 주먹을 펴고 마지막 남은 동전을 내놓을 것을 요구받습니다."라고 말한다. 긴장을 풀고 마지막 동전을 내놓는 일이 기도라면 간청만의 기도는 기도의 본질을  오해할 수 있다. 사람은 소리를 지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조용히 돌아보며 성찰하기도 하고 조목조목 이야기하다가도 시선만으로 더 분명한 말을 주고받기도 한다. 간청의 의지와 욕망이 침묵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뜻을 고요히 살피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뜻을 간청하게 될 것이다.


     통성의 미래

     통성기도는 한 시대를 이겨내게 했던 한국교회의 중요한 신앙 에너지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미있는 기도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기도 방법의 전부여서는 안 된다. 통성기도가 비록 우리의 열정을 끓게 만들고, 간절함을 자아내는 가시적인 방법이라 할지라도 걸음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어 우리네 삶과 교회를 돌아보는 침묵이 상실된 기도야말로 헛된 말로 쌓아지는 하나님 앞에서의  불손한 말들이 될 수 있다.
     큰 소리로 통성기도를 인도하는 인도자는 대중들을 인식하지 않고 얼마나 자신의 말에 집중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을까. 기도 인도하는 자의 소리와 곁에 있는 다른 이들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내 기도에 집중할 수 있을까. 기도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리기 위해 소리를 내야 하는 고역과 같은 일이 얼마나 반복되야 할까. 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안다. 침묵이 사라진 기도가 얼마나 자신을 메마르게 하는지를. 통성이 인간 내면의 한 시점을 드러내는 기도가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적용될 수 있는 기도의 표준처럼 행해진다면 그것은 왜곡된 기도의 형태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통성이 일정부분 개발과 발전에 전용된 기도의 형태여서 사람들을  일터로 이끄는 것이라면 침묵은 걸어왔던 우리의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뒤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성 베르나르드는 말한다. "보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먼저 들으라. 들을 줄 아는 자가 볼 수 있는 자이다. 듣고 귀를 기울이라! 듣는 데 순종하면 이를 통해 그대는 볼 수 있는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목회는 사람들을 얼마나 분주하게 만드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바쁜 걸음을 멈추게 하는가 이다. 통성이 세상에서 쉼 없이 뛰어다니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교회에서마저 더 빨리 움직이게 만들어 자신의 삶과 기도의 언어를 한 순간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살필 일이다. 침묵이 사라진 교회에서는 더 이상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소리만 요란한 부실공사를 너무 많이 보아왔다. 곧 무너질 건물에 희망을 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통성이 침묵을 만나 보다 깊은 기도의 세계를 만들지 못한다면 부실한 기도 앞에 오히려 절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포사이스(Peter Taylor Forsyth)는 "기도의 원리보다도 실천에 더 힘쓴 사람이 아니고서는 기도에 대한 글을 쓸 자격이 없다"고 했다. 자격 없는 사람의 작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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