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버려진 사명자/ 신명기 34,1-8

서중한 | 2003.06.29 00:45
    하나님은 오늘 이 땅위에 우리의 생명을 허락하실 때 각자에게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mission이라고 하는 사명은 나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명령이며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사명을 맡은 자라고 해도 그 분이 허락하신 뜻을 넘어서는 것은 이미 사명이 될 수 없습니다.

    욥기서에는 '지게표'라는 말이 나옵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 들이나 지역 국가 등의 경계를 구분짓는 표시로 세운 돌기둥을 가리킵니다. 야곱과 라반 사이에 세워진 언약의 표시로 돌무더기를 쌓았던 갈르엣 혹은 미스바라 불렀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지게표'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로 규정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명기 19,14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처럼 '토지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업을 자신의 임의로 조정하는 것은 소유권자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오늘 '사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 "지게표", "경계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 16편의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구역입니다. 이것을 내 임의로 옮기거나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이것은 '사명'이 아니라 치명적인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되고 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 땅위에서 하나님이 줄로 재어준 구역, '지게표'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사람, 세 사람이 합쳐서 100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 자에게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이 있는 이상 우리 모두는 100점입니다.

    저는 존경하는 한 분을 통하여 이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분은 어떤 젊은이를 만나든지, "자네는 100점이야, 자네와 자네 둘이 합쳐 100점이 되는 것이 아니야, 자네들 각자 각자가 100점이야"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마디 말로 제가 얼마나 큰 용기를 얻었는지 모릅니다. 학교에서도 100점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했는데 저보고 100점이라고 하니, 너무나 큰 힘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래 맞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신 것은 그분이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어떤 사명도 중복되거나 반복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구역을 하나님은 줄로 재어 주신다." 그 이후 제가 중 고등학생을 가르치던 청년을 가르치던 언제나 그들에게도 제가 들었던 꼭 같은 말을 되풀이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한 '지게표'가 있는 한 "너는 늘 100점"이라고 말하십시오.

   오늘 이렇듯 우리 삶에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명, 이 귀중한 말의 의미를 저는  모세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한 지도자를 통하여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을 앞장서 이끌던 당당했던 그의 모습에서가 아니라, 120의 나이로 눈을 감는 그의 모습에서 '사명'이란 말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모세는 40년을 애굽의 궁정에서, 40년을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훈련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옷과 좋은 음식으로 기름졌던 그를 하나님은 고독하고 황량한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홀로된 사막의 수도사들처럼 그는 화려한 사람들로 둘러싸인 궁전에서 벗어나 혼자 되어야 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과 마귀와의 싸움으로 가득한 광야와 사막으로 떠나면서 사막교부들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사람을 떠난다'고 말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하여 사람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 시간들 속에서 이제는 전혀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그들은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거친 광야를 영혼의 안식처로 삼았던 것입니다. 모세의 광야 40년의 세월도 이스라엘 민족을 압박하고 그 땀과 피의 대가로 화려한 옷과 음식으로 기름진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로부터 떠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 속에 허락하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떠났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불타는 가시떨기 나무에서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 냅니다. 모세가 가야할 마지막 가나안을 향한 새로운 40년의 세월은 결코 쉬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늘 자신들이 살았던 애굽을 동경하며 그곳이 더 좋았다고 말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때로는 야단치고, 타이르기도 하면서 격동의 세월을 견뎠습니다. 물이 없다고, 고기와 파, 마늘까지도 그리워하며 애굽을 생각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이런 험난한 세월을 걸어온 모세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는 성경 3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처음이 민수기 27, 12 이후의 말씀과 신명기 31장에서 34,12 절까지입니다. 이 기사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비스가 산으로 데려가셔서 가나안 땅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은 그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40년간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이끌어 왔으며 그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이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이 바로 저기인데, 저곳 때문에 40년의 눈물고개를 환란의 떡을 씹으며 달려왔는데 하나님은 비정하게도 여기서 멈추라고 하십니다. 여기까지라고 더 이상은 아니라고 줄로 재어준 구역을 모세에게 나타내십니다. 모세의 인생에서 보면 이 순간은 너무나 가슴아픈 일입니다. -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싫다는 사람 억지로 일시키시더니 결국에는 이런 식으로 나를 죽이시는가. 므리바에서 단 한번의 실수, 하나님의 거룩함을 들어내지 않았다고, 이럴 수는 없는 거지.

   모세가 120의 나이로 죽을 때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죽음은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눈이 제일 먼저 어두워진다고 하는데, 모세는 눈이 흐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나타내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버림받은 사명자'로 정하였다.

   세브란스 병원 원목으로 계신 분이 자신의 병원경험을 말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죽기 힘든 사람들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 그의 대답은 목사와 스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당신을 섬겼는데", "내가 당신께 얼마나 헌신적인 삶을 살았는데,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 자신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저는 모세의 위대함이,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라, 한사람의 신앙인으로서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시는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요단강을 넘지 못하고 이방 모압 땅에서 자신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너무도 냉정하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합니다. 민수기 27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고 "하나님이여 원컨대 한 사람을 세워서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 합니다. 모세의 비전은 자신이 40년 간이나 이끌어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민족의 지도자로 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비록 바로 여기서 쓰러져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모세가 꿈꾸던 세상이었습니다.

   신명기의 결론 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31장에서 34장을 더듬어 보면 죽음을 앞둔 모세는 백성들과,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하나님과의 계약을 준수하라는 고별사를 남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신할 때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하여 31,14에서 32,44절에 이르는 긴 노래를 짓습니다. 그리고 33,1-29까지 이스라엘 지파들을 일일이 뜨거운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신 33,1절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는 사망선고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마지막까지 지키라는 고별사를 남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면 이것을 꼭 기억하라고 긴 노래까지 만들어 부릅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죽음을 통보 받은 지도자 모세에게 노래까지 지으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비정상적인 것 같습니다. 이 비통하고 서운한 죽음을 앞두고 노래를 짓다니요, 어떻게 하면 보다 기억에 오래 남을 가락이 될 수 있을 지를 생각하면서 노래를 지어 부르다니요.
    모세는 자신이 들어가지 못하는 약속의 땅에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날을 위해 죽음을 곁에 두고 노래를 짓습니다. 그 노래를 부릅니다. 모세가 지휘자가 되어 백성들에게 노래를 가르칩니다. 자신을 죽이시는 여호와를 향해 부를 노래를. 신명기 31,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여러분! 이것이 모세의 신앙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말씀의 노래를 짓고, 그 노래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함께 부르며 프란치스꼬가 말하였듯이 죽음을 '나의 누이여'라고 속삭이며 그 죽음을 끌어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말씀대로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는 말이 이 모세에게 너무나 적절한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33년의 짧은 삶을 마감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듯이, 모세도 이름 없는 모압의 한 골짜기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문 6절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은 그가 묻힌 묘를 아무도 모르게 흔적도 없이 모세를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줄리어스 히커슨(Julius Hickerson)은 미국에서 안락한 삶을 살고 있었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의사였는데,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위해 콜롬비아에서 선교사로 일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그의 친구와 동료는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고, 그가 사역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후에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자 그 스스로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멀리 떨어진 마을에 보급품을 전해주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원주민이 비행기 잔해 속에서, 그들의 말로 잘 번역된 성서를 발견하고, 그들은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그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남침례교회에서 이 지역으로 다시 선교사를 파송했을 때 그 선교사는 이 지역이 완전히 복음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교사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자 사람들은 성서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 성경 표지의 안쪽에는 줄리어스 히커슨이라는 이름이 써 있었습니다.  

   줄리어 히커슨의 사명은 콜롬비아 원주민의 말로 쪽 복음 하나 번역하는 것이었고, 비행기에서 추락하여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데까지였습니다. 우리의 사명이 끝나면 우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나의 사명은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비전이므로 나는 사라지고 그분의 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자신의 흔적이 아닌,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위해, 오직 예수님만 존귀히 되기 위해, 나는 버려지고 배설물로 여겨지기 위해, 그는 온 몸에 매맞은 흔적과 돌에 맞은 흔적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손과 옆구리에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남기셨는데, 그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우리는 왜 이 상처가 없는 가요.  농군의 손은 굵은 굳은살이 박혀 있어야 하고, 기름쟁이의 손은 기름때가 묻어 있어야하고, 어부의 손은 소금기가 저려있어야 하지요. 그렇다면 예수꾼의 손에는 예수의 상처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손결은 왜 이리 깨끗하고 부드러운가요.

   초등학교 시절 용의검사 때는 손이 너무 더러워서 선생님 앞에 손을 제대로 내밀지 못했는데  오늘은 내 손이 너무 부드럽고, 깨끗해 못 자국 난 손과 발을 가지신 그 분 앞에 손 내밀기가 부끄럽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오늘 나를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는데 나는 왜 버림받기를 두려워하는가요.

   예루살렘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던 via dolorosa라고 하는 '고난의 길' 구비 구비마다 자신의 피와 땀을 쏟으시고, 자존심과 인성이 지니신 모든 욕망을 버리셨는데,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셨는데. 오늘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무엇인가를 더 많이 얻기 위해서라기 보다 더 많은 것을 버리지 못해 안타까운 길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사명을 통해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소서,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은 바로 나를 보내실 일 끝나면 나는 버림받아도 좋다는 마음까지도 포함된 것입니다.

   시인이 아무리 수 없는 밤을 새워 주옥같은 한편의 시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시가 씌어진 순간 이미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시인의 손을 떠나 그것을 읽고 감상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묻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숫한 밤을 지새며 이룬 일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이 이루어지면 사명은 나를 떠나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영광과 결실까지도, 사명의 대가조차도 버리게 하옵소서. 내 인생의 지계표를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게 하소서. '보기는 보아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 앞에서도, 죽음의 선고를 받고서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며, 노래를 지어 부르고 그들을 축복하며 나는 버려지게 하옵소서.  

    출생 후 3개월만에 어머니로부터 강가에 버림을 받았던 모세, 그는 120살이 된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가 강가에서 버림을 받았을 때, 바로의 딸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듯이 이제는 우리 하나님이 생명수 강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버림받은 사명자 모세 - 저마다 작은 수고와 고생의 대가를 찾으려는 요즘 광야길처럼 주름진 그의 얼굴이 그립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1,021개(21/52페이지)
편집자 칼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621 [임재호 칼럼] 목적이 있는 삶을 사십시오 임재호 2019.07.27 22:56
620 모바일 [서상진 칼럼] 낡은 찬송의 추억 서상진 2019.07.26 16:53
619 모바일 [김성욱 칼럼] < 나아만의 시대 > 김성욱 2019.07.22 15:28
618 [서상진 칼럼] 꼭 눈물을 흘려야 은혜를 받는 것일까요? 서상진 2019.07.22 06:52
617 모바일 [서상진 칼럼]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 서상진 2019.07.20 14:49
616 모바일 [서상진 칼럼] 누구와 함께 할때 평안하십니까? 서상진 2019.07.17 10:00
615 모바일 [서상진 칼럼] 다 안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서상진 2019.07.16 08:19
614 모바일 [김성욱 칼럼] 배타적인 기독교 김성욱 2019.07.14 07:33
613 [서상진 칼럼] 한 해의 반을 보내면서 서상진 2019.07.11 11:47
612 모바일 [김성욱 칼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유산 사진 첨부파일 김성욱 2019.07.08 11:10
611 [서상진 칼럼] 자족하는 능력 서상진 2019.07.03 05:02
610 [서상진 칼럼] 선택과 책임 서상진 2019.07.01 10:00
609 [임재호 칼럼]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임재호 2019.06.30 16:19
608 [서상진 칼럼] 말보다는 책임있는 행동으로 사진 첨부파일 서상진 2019.06.28 11:55
607 [서상진 칼럼] 문제에 대한 예방과 관심 서상진 2019.06.23 09:57
606 [서상진 칼럼] 하나님보다는 스마트폰을 서상진 2019.06.21 05:12
605 모바일 [김성욱 칼럼] 진리는 타협하지 않는다. 김성욱 2019.06.18 07:18
604 모바일 [서상진 칼럼] 번영이 수치로 서상진 2019.06.15 20:15
603 [임재호 칼럼] 고난의 문을 참고 견디며 걸어가는 그리스도인 임재호 2019.06.09 19:23
602 [서상진 칼럼] 신앙생활의 순 서상진 2019.06.08 04:5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