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도시화의 문제

안영혁 | 2003.07.07 09:43
저는 이제 도시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도시는 통째로 욕망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도 얼기설기 얽혀 있습니다.
도시를 부인하고 보면 생명이 없고,
그냥 긍정하면 생명이 생기가 없습니다.
내가 과연 도시를 해부할 수 있을까?
이것을 내 인생에서 마지막 연구처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정말 여기에는 제 총력을 다 기울이려고 합니다.
제가 총력을 기울여 봤자지만 젊은 시절 가졌던 그 정직함을 또 다시 생생하게 쏟아
서 이 문제를 건드려 보려고 합니다.
저는 워낙 마음이 예수께 깊이 가 있고, 그 예수는 세상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어딘
지 서늘하고 깊은 곳으로 이끄는 분이셨습니다.
나는 물론 다시 그 분의 그 자리로 갈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게는 깔끔하게는 해명되지 못한 도시를 해명해야겠고,
나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도 이것을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그가 내 마음을 차지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 마음으로 도시를 보겠다는 것이죠.
저는 현재로는 도시 구조의 문제와(도시 공학이나 사회복지학이 이런 것을 이야기하
겠죠) 다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문제(요즈음 각광받는 상담학은 어쨌든 사람의 얼굴만
큼 각각 다른 마음을 다루고 있죠), 그리고 여기에 영적인 휴식을 제공하는 일(제가
전공으로 삼고 있는 영성신학이 이런 역할을 해야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크게 3가지
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좀 막막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지나가시는 분들에게 조언을 부탁합니다.
도시는 내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그런 글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보는 도시는 추상적이다, 아직도 진짜 고통의 도시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
다, 그런 이야기도 아픈 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쨌든 세상을 향하여 그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말 한 마디는 저로서는 그것이라 생각
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봄 동안에 총회신학원이라는 학교에서 [영성신학] 강의를 했습니다.
유학도 안 갔다 온 사람이 자기 관심으로 늘어놓은 것을 학생들이 그래도 진지하게
들어주었습니다.
그 진지함 가운데 나름대로 공부를 좀더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영성의 문제는 바로 도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례로 13세기 도미니크 수도회는 설교를 중시하였고, 좋은 설교를 위해서 학문을 권
장한 수도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설교를 중시했겠습니까?
물론 고대로부터 흘러오는 예수의 말씀을 잘 밝히려고 한 것도 있지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그 때 이미 사람들이 상공업을 위해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
던 것이죠.
그렇게 도시가 형성되면서부터 교회의 덜떨어진 면이 심각하게 제기되었고,
그 시대로서는 좋은 설교를 듣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미니크 수도회는 말하자면 도시화문제에 대한 그 시대의 응답이었습니다.
21세기 초두에 서서 소위 영성신학을 하는 자로서 이 도시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습
니다.
이 시대에는 이 시대의 방식을 따라서 도시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결말이 무엇이든 그 일을 향해 달려가고 싶습니다.
달려간다기보다는 침잠해야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그 일을 해야한다는 책임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무릇 촌 동네에 사시는 분들이 반발을 느낄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저 옛날부터 항상 문제는 도시에서 생겨왔던 것입니다.
시골은 항상 도시에 약탈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시는 던져버릴 수 없는 삶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말하는 것이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어쨌든 도시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먼 훗날 그것이 오판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이 기형적인 땅 도시에 사는 것이 무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러 말을 접어두고 도시화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많은 조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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