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길 위에 있어야 길을 묻는 이를 만난다

문양호 | 2018.01.17 14:11
뚜벅이를 많이 하다 보니 걷는 것은 일상이다. 그렇게 길을 걷다보면 길을 묻는 이가 여럿 있곤 한다. 익숙한 길인 경우는 자세히 길을 안내하고 주의할 점도 일러주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길을 가르쳐 주곤 한다. 특히나 외국인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이, 어르신 등은 더 주의해서 알려드리곤 한다. 가끔씩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서 알려준 길이 잘못 되었거나 많이 돌아가는 길이었음을 길을 물었던 이가 떠나간 뒤에야 깨닫고는 미안함과 어찌할 수 없음으로 후회할 때도 있었다.

뚜벅이 목회를 하다 보니 이전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이전에는 만나지 못할 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은 공동체 밖에 머무는 이들이 적지 않아 길을 잃고 헤매거나 길을 찾는 이들인 경우가 많다. 그들이 길을 잃음은 있어야 할 곳을 떠났기 때문이거나 안주할 곳을 아직 찾지 못함이다. 울타리 안에 있는 목사나 성도는 굳이 길을 물을 이유도 찾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거함도 당장은 그들이 있는 곳이 평안한 곳일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장막이라는 임시거처일 뿐 하나님이 말씀하신 영원한 곳일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주 착각한다. “이곳이 좋사오니”라고 말하며 그곳이 영원하거나 장기 거주가 가능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때는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마치 돼지삼형제의 짚으로 만든 집이나 모 영화 속의 카드로 만든 집 같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다니엘 5장의 벨사살이나 어리석은 부자마냥 자기만족에 취해있을 때가 있다. 결국 그들의 지나친 안주는 목적지로 가는 것을 망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설혹 그곳이 나름 안전한 거처이고 그들에게는 안식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안식이고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는 양도 사랑하시지만 우리 밖의 양도 사랑하시고 안타까워하신다.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울타리 밖을 잊고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울타리 밖의 이들을 울타리 안으로 이끌거나 그들이 제대로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울타리 안에만 주저앉아 있을 때 정작 길을 잃고 헤매거나 갈 곳을 알기 원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다. 길을 찾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길 위에 서야 한다.

이전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당시 몇 년간 이전에 양육하던 후배나 지인들을 거의 만나지 못하고 세월을 보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바빴고 울타리 안의 일을 하기에도 버거웠다. 울타리 안에서도 많은 이들을 만나고 상담하긴 했지만 그들은 대부분 울타리 안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물었지 순례자의 물음을 가진 이들은 별로 없었던 듯싶다. 울타리 밖으로 나오니 춥고 배고플지는 모르지만 길을 찾는 이들을 보게 된다.

길 위에 서있는 지금 누군가 길을 물을 때 예고나 암시가 있는 경우는 없기에 당혹스럽고 내게 질문을 던지는 이가 어떤 이인지 몰라 불안할 때도 있다. 울타리 안에서는 예측 가능한 질문과 대화하는 이가 누구인지 안다는 평안함 속에서 출발하지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길을 묻는 이들은 길 자체를 묻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숨은 의도를 가졌는지 모를 때가 있다. 그것조차 감수하는 것이 길을 가르쳐 주는 이의 역할일 것이다.

또 어떤 경우는 길을 묻더라도 그들 일부는 그들이 생각하는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 싶을 때에는 가차 없이 떠날 때가 종종 있다. 그렇게 떠나가는 이들 중 목적지로 바르게 나아가는 이들은 나름 괜찮지만 어떤 이는 가르쳐준 길과는 상관없이 또 다른 샛길이나 반대방향으로 가버리거나 안주하지 말아야 할 곳에 주저앉는 이들도 있다. 길은 열심히 묻고 다니지만 정작 그들은 대로 가는 어리석음을 택하는 이들이 있다.

최근에도 몇 년간 상담했던 청년이 전화번호까지 바꾸고 잠수를 타버려 어떻게 도울 수 없는 일이 벌어졌었다. 또 오랫동안 여러 가지로 문제를 보살펴드리며 교제했던 이가 소식 자체를 끊어버린 경우를 겪기도 했었다. 그런 일들을 여러 번 겪다보면 어떤 때는 그것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찔린 데 또 찔리면 익숙해지기도 할 만하지만 덧난 상처는 더 깊숙이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위안을 삼는 것은 내 자신이 그들의 최종 목적지나 안식처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내가 그들에게 잠시의 휴식처나 오아시스 같은 역할이 되었다면 그리고 그들이 당장은 좀 돌아가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 가야할 목적지로 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내게 또 하나의 기쁨이 될 수 있음을 믿기에 오늘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헤매더라도 많이 헤매지 말기를, 그리고 목적지에는 도착할 수 있기를 말이다.

길을 묻는 이가 나와 영원히 갈 수 없음을 알기에 이별도 익숙해지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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