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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로의 여정
목회와 영성/U. T. 홈즈/김외식/대한기독교서회
본서는 목회자와 영성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1부에서 영성이 의미하는 바와 성직자가 빠지기 쉬운 죄를 지적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내면을 지향하는 영성적인 성격을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설명하고, 마지막 3부에서는 예배와 기도의 문제를 영성적 차원에서 조망하고 있다.
● 저자 U. T. 홈즈
● 서평
본서의 저자는 각 종 세미나와 목회자들(여러 교단 목회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과의 상담 및 설문 조사를 통하여 글을 전개하고 있다. 총 3부로 되어 있는 본서는 1부에서 영성이 의미하는 바와 성직자가 빠지기 쉬운 죄를 지적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내면을 지향하는 영성적인 성격을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설명하고, 마지막 3부에서는 예배와 기도의 문제를 영성적 차원에서 조망하고 있다.
'영성'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에는 제 각기 다른 대답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영성'이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테두리라도 금그어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미 우리 안에도 사이비 영성운동들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모습들을 자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홈즈는 5가지 항목으로 영성을 정의하고 있다.
① 인간의 관계성 형성 능력이며 ② 그 관계의 대상은 감각 현상을 초월하는 존재이며
③ 이 관계는 주체의 노력과는 별개의 것으로, 확장되거나 고양된 의식으로서 인식되며
④ 역사적 상황 속에서 본질을 받고 ⑤ 세계 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그 자신을 드러낸다.(29쪽)
인간 존재는 본질상 관계성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창조된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삶의 본질로 가지고 있다. 이런 사실이 '영성'의 시작이 된다. 초월적 대상과 관계를 갖고자 하는 열망이 인간에게는 남아 있고, 이 관계 속에서는 인간은 그 대상을 열린 상태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만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나님, 즉 지식의 참된 근원으로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열린 상태로 기다린다는 것'은 기도의 상태(이것을 홈즈는 관상<'觀想'>이라고 말한다. 38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것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창조된 인간은 기도 속에서 지속적인 초월자와의 관계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무의식 중에 수많은 기도를 드린다. 단지 그것은 하워드 L. 라이스가 말했듯이 '자연적 기도'로서 그 구체적 대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단계에 머물 뿐이다. 즉 인간은 보이지 않는 힘을 향해 울부짖는 본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개혁주의 영성』89-90쪽)
그러므로 기도는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 숨쉬는 호흡과도 같은 것이고, 매일의 식사와도 같은 것이다. 저자 역시 기도는 하나님께 소원 목록을 작성하는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40쪽)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이자, 그 분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참다운 관계가 이 기도의 행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들음'(listening)의 상태로 나간다.(46쪽)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전을 깨닫고 그 분과 소통하는 진실된 관계를 망각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기도의 '요구 사항'에 얽매여서 그 '요구 사항'이 응답되지 않을 때는 즉각적인 회의의 상태로 빠지고 말 것이다. 영성신학이란 철학적 사고의 내면적 논리를 그 기초로 삼는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신학과는 좀 다른 유형의 것이다. 영성신학은 전통적인 '수덕신학'(ascetical theology)과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을 통합적으로 사용한 개념이다. '수덕'이란 '훈련'을 의미하는 말로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 스스로를 개방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에 반해 '신비신학'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50-51쪽)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합일'이란 일반 종교에서 나타나는 초월적 신비를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의 개체적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 '연합'되어지는(그래서 이것은 종종 '결혼'과 비유되기도 한다. 두 사람의 인격이 상실되지 않으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베르나르도의 '사랑의 신비주의'나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를 가지는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의 구분을 홈즈는 '수덕신학'이 '도구적 이미지'(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과 관계가 있다.)를 지닌다면 '신비신학'은 '종착적 이미지'(terminal image)를 갖게 된다고 한다.(51쪽) '수덕'이 이러한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도구'자체에 얽매이게 되어서, 힘든 영적 훈련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자학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적 의미에서 '금욕주의'(ascetism)이라고 보통 말한다.
성직자는 하나님의 신비에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알던 모르든 간에 우리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설교 단상에서뿐만 아니라, 각종 예전과 심방에서 병자의 침실에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하나님의 깊은 영적 능력에 다가서지 못한다면 올바른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목회자는 언제나 '능동적 수동성'(an active passivity)을 간직해야 한다.(59쪽) 내가 언제나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 연구와 묵상을 실행하지만, 그곳에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바라는 극히 수동적인 측면이 있음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비단 '말씀'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목회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이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할 때 '전달자'요 '안내자'로서의 목회자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잘못된 세계관을 전복시키고, 바른 순례자의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전달자'란 전달할 내용의 근거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 있으며, 자신은 거울을 들고 비추는 역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62쪽) 그래서 목회직에 엄습하는 고독과 많은 갈등들을 겸손하게 받들 수 있는 것이다. 섬기는 자로서의 목회적 이미지는 언제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하리라. 초대 교회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사막과 수도원을 찾았던 교부들과 영성가들은 속세의 죄악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숨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악마가 사막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고, 그 악마와 싸우기 위하여 싸늘한 저녁 바위에 몸을 기대고 새벽이 동터올 때까지 달과 별을 벗삼아 깊은 기도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철야와 금식과 성독으로 자신의 삶을 불태웠다. 내면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죄악들과 몸부림치면서 싸웠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 목회자들은 우리 자신의 죄악과 싸우기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혀 비진리와 타협하면서 자신에게 죄를 짓는다. 목회자에게도 권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권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출처를 가지고 있다.
성직이라는 직분은 권력에의 소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나 사제의 권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력이다.(71쪽)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허락하셨던 '권능'(행 1:8) 과 '권세'(눅 5:23)가 오늘 목회자들에게 위임되어야 한다. 교회도 하나의 '권력의 정치'(74쪽)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의 권력 정치'여야 하겠다. 말씀과 기도와 삶의 영성을 자신의 고향으로 삼아 그곳으로 계속해서 돌아가지 않는 목회자는 목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저울에 합격점을 받은 정품을 사용하지 않고, 중량미달의 불량품으로 목회 성공의 척도를 삼게 됨은 당연한 이치이다. 새로운 영적 힘을 공급받지 못해 탈진 상태에 빠진 목회자는 자원의 고갈로 인하여 사역의 현장을 회피하거나, 자신을 교인들과 현장으로부터 격리시켜 아주 낯선 곳에서 '권위'를 찾게 된다. '안전제일주의'를 목회의 지향점으로 삼게 되어, 때로는 역설적인 말씀으로 세상과 교회를 향하여 외쳐야 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다는 것도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어린 양'들이다. 이렇듯 어려운 삶의 정황 속에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도구'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성직자의 뿌리에는 '나태'와 '식어버린 열정'이 도사리고 있다.
주님의 실패의 상징을 우리들 제단 위에, 우리들 교회 꼭대기에, 우리들 편지지에 그리고 우리 목둘레에다 걸치고 있으면서도 실패와는 상관없는 자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겠는가?(86쪽)
십자가는 완전한 실패이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의 곁을 떠나고, 사람들은 조롱하지 않았던가. 그 실패의 현장에 목회자가 서 있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실패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목회자들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지 모른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이것이 뒤바뀌고 있다. 이것이 나를 포함한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강력히 요구되는 영성적 요소라고 생각된다. 사실 '제자'란 '가르침'이라는 라틴어 disciplina에서 나온 말로서, 자기 스승의 훈련과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94쪽) 목회자이기 전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의 가르침과 훈련에 동참하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이다.
오직 그의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람으로서 은총의 빛 아래 실오라기 하나라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목회자, 그는 더 풍성한 숨을 내 뿜기 위하여 깊은숨을 들이마시는 사람과도 같다. '순종'이란 말 자체가 고대 세계에서 문지기가 행하던 일을 전문적으로 나타내던 용어가 아니었던가. 문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나, 노크가 울릴 때면 신속히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95쪽)
온통 주인에게 쏠려 있던 그의 눈과 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소유해야할 '순종'일 것이다. 이미 다른 곳에서도 언급하였으나, 바쁜 도시 목회 생활에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상실된 느낌이다. 자유로운 내 영혼이 사물과 사람을 가만히 응시할 수 있는 시간과 내 자신의 고요한 중심지가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게 나마 관심 가졌던 이 '영성신학'을 보다 깊게 접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제자의 삶'이나 '순종'은 그 옛날 수도원에서 외쳤던 하나의 '표어'가 아니다. 언제나 외쳐져야 할 우리들의 영원한 말이자 마지막 말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부유했던 자신의 상황을 가난과 아낌없이 교환하였다. 그리하여 가난을 자신의 애인과 여인처럼, 아내처럼 사랑하고 신부처럼 가난과 결혼함으로써 신부에게서 모든 아름다운 사랑을 얻듯이 절대 청빈에서 역설적으로 그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였다. 청빈과 봉사의 삶을 좌표로 삼았던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의 햇살 앞에서는 그의 온몸을 노출시키며 실오라기도 나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한 벌의 옷조차도 거추장스러웠는지 모른다. 인간의 삶과 자연과 온 피조계가 새롭게 인식되는 깊은 영성적 체험이 결국 그를 무관심하게 버려진 성 밖의 도시 빈민들에게 관심을 갖게 했으며, 교권과 타락한 교직에 대해 과감히 비판의 깃발을 흔들게 했던 것이다. 그에게서 빛나는 영성의 환희가 우울하였던 중세의 시간 속에서 새날을 준비하게 되었으리라.(서중한, 한국교회와 영성운동(M. Div. 논문,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1995) 47쪽)
'가난'의 문제는 앞으로 그 의미를 되새겨 볼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프란치스코의 삶의 모습대로 물질과 세상의 권력과 명예가 나의 삶 속에서 단절되는 경험, 성령에 이끌리어 예수의 삶으로 초대받는 깊은 영성적 체험의 순간들이 우리에게 계속되지 않는다면 자신을 참된 그리스도의 군사로 세우기란 매우 힘들 것이다. '가난'이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119쪽) 그것은 '무일푼'을 꼭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은 세상의 것을 좀더 잃지 않을까 혹은 좀더 많이 얻으려고 염려하지 않는 마음이다. (126쪽) 부유한 생활에 집착을 하게 되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고요하고 내면적인 공간은 막혀 버리고 만다는 것은 우리의 체험이 말해 준다. 그러한 상황 속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두 마음을 품는 자'(마 5:6) 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때로는 금식과 철야 등을 포함하는 금욕적인 생활에 뛰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고, 그 분과의 만남을 다 가깝게 하려는 최선의 노력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중요한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금식을 하는 도중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고, 우리의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고백 드린다. 원래의 소박한 마음, 단순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두 마음'을 가급적 멀리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야 말로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평화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 첨탑에서 이전 시인 윤동주가 발견하였던 '햇빛'(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루이스 뿌이어(Louis Bouyer)의 말대로 "프로테스탄티즘이 중세기 경건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그 산물이라고 함이 훨씬 옳은 말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중세기 경건에서 씨앗의 형태로 있던 것이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169쪽) 중세를 단순히 '암흑기'로 보는 것은 지나친 단편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중세기가 지닌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으나, 기독교에 흐르는 큰 경건의 흐름이 중세를 거쳐 내려오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세의 부정적인 측면을 제거하고, 그 안에 담겨진 참된 기독교의 경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발굴하는 일일 것이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유명한 저작『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아직도 우리에게 애독되고 있으며,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애송하는 시가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예전적인 부분들을 (특별히 예배의식과 성찬에 관하여) 이전 전통에서 새롭게 조망할 필요성이 있다. '전자 교회'(electronic church)(117쪽)라고 불리는 현대 교회 속에서 무반주 성가가 고요하게 울려 퍼지고, 사람과 사람의 접촉과 (현대의 영상매체에 반하여) 그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던 그 단조로움이, 성례를 준비하며 그 전날 사제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고해성사'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나, 성례를 철저히 준비한다는 측면에서) 그 간절함이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서는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것이 바른 해석인지는 몰라도 우리 개신교는 신앙의 내용 즉 '오직 성경'을 너무 강조하므로 신앙의 형식적인 측면, 그 상징과 의미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하고 생각된다. 하나의 '상징'이란 상징 그 자체가 아니라, 상징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가리킨다.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우리는 '상징'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상징이 '그 무엇'을 가리키지 않고 자신을 가리킬 때는 상징이 '우상'이 된다. 이것이 상징의 부정적인 면이다. 우리 교회는 이런 상징의 부정적인 면을 너무 두려워해서 강단의 십자가를 치우도록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십자가 뒤에 숨은 상징적 의미,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그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풍성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대가를 치른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가 신앙의 형식과 의식을 소홀히 한다는 한 단면이다. 그 결과는 예배의 형식에도 나타난다. '말씀'에 대한 강조는 결국 예배에 있어서 '설교'에 편중된 형태를 나타나게 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설교가 그 날 예배와 교회 성장의 성공여부를 가늠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병폐는 심각하다. 어느 교회의 목회자 설교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 교인들은 철새처럼 그곳을 향해 날아가고, 목회자들 가운데는 그 설교를 '무단 복제'(?) 하다가 몇 몇 교인들에게 발각되어 교회를 사임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설교에 타고난 은사를 가질 수는 없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카톨릭과 개신교를 비교하자면 카톨릭은 사제들에게 연간 설교 본문과 간략한 설교 내용을 제공한다. 거기에서 각 신부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따라 말씀을 덧붙인다. 그들의 설교는 철저히 '교회력'에 맞추어져 있다. 원고를 보고 읽다시피 하는 짧은 강론이지만 사람들은 우리 개신교처럼 그렇게 많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신도들이 참여할 수 있는 보다 풍성한 예배 형식들이 설교 이외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려도 두 줄로 길게 나와 각자가 준비한 헌금을 제단 앞에 공손히 바친다.(우리 교단에서도 특별절기에 이렇게 하는 교회들이 더러 있다) 매주 사제가 그에게 전달하는 떡과 잔을 받는다. 본서에 등장하는 한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성만찬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 사역과 복음과 동등한 위치에 있지요. 내게 관한 한 성만찬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미국의 발전에 있어서 문제 중 하나는 설교자에게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성례전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77쪽)
이 글을 보면 한국교회의 예전적인 문제가 미국 교회의 영향임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루터는 자신의 연구실의 벽면에 라틴어로 "나는 세례를 받았다"라는 말을 새겼다고 한다. 죽음 속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늘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181쪽) 세례는 죽음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 죽음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꽃피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의식과 예전은 나름대로 귀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특별히 성찬은 저자가 '구강적인 통합의 성례전'(a sacrament oforal incorporation)(187쪽)이라고 부를 정도로 촉감, 시각, 청각, 미각, 후각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는 귀한 예식이다.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을 사용하셔서 하늘의 신비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육신된 그리스도는 새로운 신앙의 안목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로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하듯이 예수의 피와 살이 아니고서는 굶주린 우리 영혼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원'을 다녀온 사람이 전해 준 말이었다. 그곳에서 성찬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서로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서로 깊은 포옹을 한다고 한다. 그 순간 곁의 형제들과 가슴을 열고 얼싸안지 못하는 이들은 조용히 나가 회개의 시간을 갖는 다는 것이다.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은 물론이고, 지체들의 하나됨이 살아나는 성찬은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종교적 상상력이 상실되고, 직관이 약화된 현대인들에게 점점 줄어드는 예전의식들은 '실재의 객관화'(179쪽)에 더 빠져들게 하여 오직 '말'과 '문자'에 매달리게 한다. 보고 듣는 것 이외에 내면적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것이다.
다음의 말을 교육학적으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성례전적인 이미지가 일단 심층 지평에 자리를 잡게 되면, 거기에 영구히 머물게 된다. 종교교육가들이 성례전적인 환경에서 어린아이들을 지도하게 된다면, 저들로 하여금 아주 확고한 신앙을 갖게 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거듭 깨닫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181쪽)
본인은 이 책을 나름대로 소화하여 오늘의 현실과 연결하려고 시도하였다. 때론 전문적인 용어들이나, 난해한 해석으로 인하여 내용 파악이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출발을 통하여 보다 나은 '영성'에로의 여정이 나에게 펼쳐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서중한)
본서는 목회자와 영성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1부에서 영성이 의미하는 바와 성직자가 빠지기 쉬운 죄를 지적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내면을 지향하는 영성적인 성격을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설명하고, 마지막 3부에서는 예배와 기도의 문제를 영성적 차원에서 조망하고 있다.
● 저자 U. T. 홈즈
● 서평
본서의 저자는 각 종 세미나와 목회자들(여러 교단 목회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과의 상담 및 설문 조사를 통하여 글을 전개하고 있다. 총 3부로 되어 있는 본서는 1부에서 영성이 의미하는 바와 성직자가 빠지기 쉬운 죄를 지적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내면을 지향하는 영성적인 성격을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설명하고, 마지막 3부에서는 예배와 기도의 문제를 영성적 차원에서 조망하고 있다.
'영성'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에는 제 각기 다른 대답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영성'이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테두리라도 금그어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미 우리 안에도 사이비 영성운동들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모습들을 자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홈즈는 5가지 항목으로 영성을 정의하고 있다.
① 인간의 관계성 형성 능력이며 ② 그 관계의 대상은 감각 현상을 초월하는 존재이며
③ 이 관계는 주체의 노력과는 별개의 것으로, 확장되거나 고양된 의식으로서 인식되며
④ 역사적 상황 속에서 본질을 받고 ⑤ 세계 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그 자신을 드러낸다.(29쪽)
인간 존재는 본질상 관계성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창조된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삶의 본질로 가지고 있다. 이런 사실이 '영성'의 시작이 된다. 초월적 대상과 관계를 갖고자 하는 열망이 인간에게는 남아 있고, 이 관계 속에서는 인간은 그 대상을 열린 상태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만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나님, 즉 지식의 참된 근원으로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열린 상태로 기다린다는 것'은 기도의 상태(이것을 홈즈는 관상<'觀想'>이라고 말한다. 38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것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창조된 인간은 기도 속에서 지속적인 초월자와의 관계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무의식 중에 수많은 기도를 드린다. 단지 그것은 하워드 L. 라이스가 말했듯이 '자연적 기도'로서 그 구체적 대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단계에 머물 뿐이다. 즉 인간은 보이지 않는 힘을 향해 울부짖는 본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개혁주의 영성』89-90쪽)
그러므로 기도는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 숨쉬는 호흡과도 같은 것이고, 매일의 식사와도 같은 것이다. 저자 역시 기도는 하나님께 소원 목록을 작성하는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40쪽)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이자, 그 분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참다운 관계가 이 기도의 행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들음'(listening)의 상태로 나간다.(46쪽)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전을 깨닫고 그 분과 소통하는 진실된 관계를 망각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기도의 '요구 사항'에 얽매여서 그 '요구 사항'이 응답되지 않을 때는 즉각적인 회의의 상태로 빠지고 말 것이다. 영성신학이란 철학적 사고의 내면적 논리를 그 기초로 삼는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신학과는 좀 다른 유형의 것이다. 영성신학은 전통적인 '수덕신학'(ascetical theology)과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을 통합적으로 사용한 개념이다. '수덕'이란 '훈련'을 의미하는 말로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 스스로를 개방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에 반해 '신비신학'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50-51쪽)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합일'이란 일반 종교에서 나타나는 초월적 신비를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의 개체적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 '연합'되어지는(그래서 이것은 종종 '결혼'과 비유되기도 한다. 두 사람의 인격이 상실되지 않으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베르나르도의 '사랑의 신비주의'나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를 가지는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의 구분을 홈즈는 '수덕신학'이 '도구적 이미지'(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과 관계가 있다.)를 지닌다면 '신비신학'은 '종착적 이미지'(terminal image)를 갖게 된다고 한다.(51쪽) '수덕'이 이러한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도구'자체에 얽매이게 되어서, 힘든 영적 훈련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자학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적 의미에서 '금욕주의'(ascetism)이라고 보통 말한다.
성직자는 하나님의 신비에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알던 모르든 간에 우리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설교 단상에서뿐만 아니라, 각종 예전과 심방에서 병자의 침실에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하나님의 깊은 영적 능력에 다가서지 못한다면 올바른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목회자는 언제나 '능동적 수동성'(an active passivity)을 간직해야 한다.(59쪽) 내가 언제나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 연구와 묵상을 실행하지만, 그곳에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바라는 극히 수동적인 측면이 있음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비단 '말씀'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목회자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이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할 때 '전달자'요 '안내자'로서의 목회자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잘못된 세계관을 전복시키고, 바른 순례자의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전달자'란 전달할 내용의 근거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 있으며, 자신은 거울을 들고 비추는 역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62쪽) 그래서 목회직에 엄습하는 고독과 많은 갈등들을 겸손하게 받들 수 있는 것이다. 섬기는 자로서의 목회적 이미지는 언제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하리라. 초대 교회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사막과 수도원을 찾았던 교부들과 영성가들은 속세의 죄악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숨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악마가 사막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고, 그 악마와 싸우기 위하여 싸늘한 저녁 바위에 몸을 기대고 새벽이 동터올 때까지 달과 별을 벗삼아 깊은 기도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철야와 금식과 성독으로 자신의 삶을 불태웠다. 내면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죄악들과 몸부림치면서 싸웠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 목회자들은 우리 자신의 죄악과 싸우기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혀 비진리와 타협하면서 자신에게 죄를 짓는다. 목회자에게도 권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권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출처를 가지고 있다.
성직이라는 직분은 권력에의 소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나 사제의 권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력이다.(71쪽)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허락하셨던 '권능'(행 1:8) 과 '권세'(눅 5:23)가 오늘 목회자들에게 위임되어야 한다. 교회도 하나의 '권력의 정치'(74쪽)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의 권력 정치'여야 하겠다. 말씀과 기도와 삶의 영성을 자신의 고향으로 삼아 그곳으로 계속해서 돌아가지 않는 목회자는 목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저울에 합격점을 받은 정품을 사용하지 않고, 중량미달의 불량품으로 목회 성공의 척도를 삼게 됨은 당연한 이치이다. 새로운 영적 힘을 공급받지 못해 탈진 상태에 빠진 목회자는 자원의 고갈로 인하여 사역의 현장을 회피하거나, 자신을 교인들과 현장으로부터 격리시켜 아주 낯선 곳에서 '권위'를 찾게 된다. '안전제일주의'를 목회의 지향점으로 삼게 되어, 때로는 역설적인 말씀으로 세상과 교회를 향하여 외쳐야 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다는 것도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어린 양'들이다. 이렇듯 어려운 삶의 정황 속에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도구'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성직자의 뿌리에는 '나태'와 '식어버린 열정'이 도사리고 있다.
주님의 실패의 상징을 우리들 제단 위에, 우리들 교회 꼭대기에, 우리들 편지지에 그리고 우리 목둘레에다 걸치고 있으면서도 실패와는 상관없는 자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겠는가?(86쪽)
십자가는 완전한 실패이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의 곁을 떠나고, 사람들은 조롱하지 않았던가. 그 실패의 현장에 목회자가 서 있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실패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목회자들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지 모른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이것이 뒤바뀌고 있다. 이것이 나를 포함한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강력히 요구되는 영성적 요소라고 생각된다. 사실 '제자'란 '가르침'이라는 라틴어 disciplina에서 나온 말로서, 자기 스승의 훈련과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94쪽) 목회자이기 전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의 가르침과 훈련에 동참하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이다.
오직 그의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람으로서 은총의 빛 아래 실오라기 하나라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목회자, 그는 더 풍성한 숨을 내 뿜기 위하여 깊은숨을 들이마시는 사람과도 같다. '순종'이란 말 자체가 고대 세계에서 문지기가 행하던 일을 전문적으로 나타내던 용어가 아니었던가. 문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나, 노크가 울릴 때면 신속히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95쪽)
온통 주인에게 쏠려 있던 그의 눈과 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소유해야할 '순종'일 것이다. 이미 다른 곳에서도 언급하였으나, 바쁜 도시 목회 생활에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상실된 느낌이다. 자유로운 내 영혼이 사물과 사람을 가만히 응시할 수 있는 시간과 내 자신의 고요한 중심지가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게 나마 관심 가졌던 이 '영성신학'을 보다 깊게 접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제자의 삶'이나 '순종'은 그 옛날 수도원에서 외쳤던 하나의 '표어'가 아니다. 언제나 외쳐져야 할 우리들의 영원한 말이자 마지막 말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부유했던 자신의 상황을 가난과 아낌없이 교환하였다. 그리하여 가난을 자신의 애인과 여인처럼, 아내처럼 사랑하고 신부처럼 가난과 결혼함으로써 신부에게서 모든 아름다운 사랑을 얻듯이 절대 청빈에서 역설적으로 그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였다. 청빈과 봉사의 삶을 좌표로 삼았던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의 햇살 앞에서는 그의 온몸을 노출시키며 실오라기도 나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한 벌의 옷조차도 거추장스러웠는지 모른다. 인간의 삶과 자연과 온 피조계가 새롭게 인식되는 깊은 영성적 체험이 결국 그를 무관심하게 버려진 성 밖의 도시 빈민들에게 관심을 갖게 했으며, 교권과 타락한 교직에 대해 과감히 비판의 깃발을 흔들게 했던 것이다. 그에게서 빛나는 영성의 환희가 우울하였던 중세의 시간 속에서 새날을 준비하게 되었으리라.(서중한, 한국교회와 영성운동(M. Div. 논문,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1995) 47쪽)
'가난'의 문제는 앞으로 그 의미를 되새겨 볼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프란치스코의 삶의 모습대로 물질과 세상의 권력과 명예가 나의 삶 속에서 단절되는 경험, 성령에 이끌리어 예수의 삶으로 초대받는 깊은 영성적 체험의 순간들이 우리에게 계속되지 않는다면 자신을 참된 그리스도의 군사로 세우기란 매우 힘들 것이다. '가난'이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119쪽) 그것은 '무일푼'을 꼭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은 세상의 것을 좀더 잃지 않을까 혹은 좀더 많이 얻으려고 염려하지 않는 마음이다. (126쪽) 부유한 생활에 집착을 하게 되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고요하고 내면적인 공간은 막혀 버리고 만다는 것은 우리의 체험이 말해 준다. 그러한 상황 속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두 마음을 품는 자'(마 5:6) 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때로는 금식과 철야 등을 포함하는 금욕적인 생활에 뛰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고, 그 분과의 만남을 다 가깝게 하려는 최선의 노력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중요한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금식을 하는 도중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고, 우리의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고백 드린다. 원래의 소박한 마음, 단순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두 마음'을 가급적 멀리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야 말로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평화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 첨탑에서 이전 시인 윤동주가 발견하였던 '햇빛'(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루이스 뿌이어(Louis Bouyer)의 말대로 "프로테스탄티즘이 중세기 경건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그 산물이라고 함이 훨씬 옳은 말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중세기 경건에서 씨앗의 형태로 있던 것이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169쪽) 중세를 단순히 '암흑기'로 보는 것은 지나친 단편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중세기가 지닌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으나, 기독교에 흐르는 큰 경건의 흐름이 중세를 거쳐 내려오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세의 부정적인 측면을 제거하고, 그 안에 담겨진 참된 기독교의 경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발굴하는 일일 것이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유명한 저작『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아직도 우리에게 애독되고 있으며,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애송하는 시가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예전적인 부분들을 (특별히 예배의식과 성찬에 관하여) 이전 전통에서 새롭게 조망할 필요성이 있다. '전자 교회'(electronic church)(117쪽)라고 불리는 현대 교회 속에서 무반주 성가가 고요하게 울려 퍼지고, 사람과 사람의 접촉과 (현대의 영상매체에 반하여) 그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던 그 단조로움이, 성례를 준비하며 그 전날 사제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고해성사'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나, 성례를 철저히 준비한다는 측면에서) 그 간절함이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서는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것이 바른 해석인지는 몰라도 우리 개신교는 신앙의 내용 즉 '오직 성경'을 너무 강조하므로 신앙의 형식적인 측면, 그 상징과 의미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하고 생각된다. 하나의 '상징'이란 상징 그 자체가 아니라, 상징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가리킨다.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우리는 '상징'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상징이 '그 무엇'을 가리키지 않고 자신을 가리킬 때는 상징이 '우상'이 된다. 이것이 상징의 부정적인 면이다. 우리 교회는 이런 상징의 부정적인 면을 너무 두려워해서 강단의 십자가를 치우도록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십자가 뒤에 숨은 상징적 의미,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그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풍성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대가를 치른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가 신앙의 형식과 의식을 소홀히 한다는 한 단면이다. 그 결과는 예배의 형식에도 나타난다. '말씀'에 대한 강조는 결국 예배에 있어서 '설교'에 편중된 형태를 나타나게 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설교가 그 날 예배와 교회 성장의 성공여부를 가늠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병폐는 심각하다. 어느 교회의 목회자 설교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 교인들은 철새처럼 그곳을 향해 날아가고, 목회자들 가운데는 그 설교를 '무단 복제'(?) 하다가 몇 몇 교인들에게 발각되어 교회를 사임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설교에 타고난 은사를 가질 수는 없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카톨릭과 개신교를 비교하자면 카톨릭은 사제들에게 연간 설교 본문과 간략한 설교 내용을 제공한다. 거기에서 각 신부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따라 말씀을 덧붙인다. 그들의 설교는 철저히 '교회력'에 맞추어져 있다. 원고를 보고 읽다시피 하는 짧은 강론이지만 사람들은 우리 개신교처럼 그렇게 많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신도들이 참여할 수 있는 보다 풍성한 예배 형식들이 설교 이외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려도 두 줄로 길게 나와 각자가 준비한 헌금을 제단 앞에 공손히 바친다.(우리 교단에서도 특별절기에 이렇게 하는 교회들이 더러 있다) 매주 사제가 그에게 전달하는 떡과 잔을 받는다. 본서에 등장하는 한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성만찬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 사역과 복음과 동등한 위치에 있지요. 내게 관한 한 성만찬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미국의 발전에 있어서 문제 중 하나는 설교자에게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성례전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77쪽)
이 글을 보면 한국교회의 예전적인 문제가 미국 교회의 영향임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루터는 자신의 연구실의 벽면에 라틴어로 "나는 세례를 받았다"라는 말을 새겼다고 한다. 죽음 속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늘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181쪽) 세례는 죽음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 죽음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꽃피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의식과 예전은 나름대로 귀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특별히 성찬은 저자가 '구강적인 통합의 성례전'(a sacrament oforal incorporation)(187쪽)이라고 부를 정도로 촉감, 시각, 청각, 미각, 후각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는 귀한 예식이다.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을 사용하셔서 하늘의 신비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육신된 그리스도는 새로운 신앙의 안목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로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하듯이 예수의 피와 살이 아니고서는 굶주린 우리 영혼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원'을 다녀온 사람이 전해 준 말이었다. 그곳에서 성찬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서로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서로 깊은 포옹을 한다고 한다. 그 순간 곁의 형제들과 가슴을 열고 얼싸안지 못하는 이들은 조용히 나가 회개의 시간을 갖는 다는 것이다.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은 물론이고, 지체들의 하나됨이 살아나는 성찬은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종교적 상상력이 상실되고, 직관이 약화된 현대인들에게 점점 줄어드는 예전의식들은 '실재의 객관화'(179쪽)에 더 빠져들게 하여 오직 '말'과 '문자'에 매달리게 한다. 보고 듣는 것 이외에 내면적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것이다.
다음의 말을 교육학적으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성례전적인 이미지가 일단 심층 지평에 자리를 잡게 되면, 거기에 영구히 머물게 된다. 종교교육가들이 성례전적인 환경에서 어린아이들을 지도하게 된다면, 저들로 하여금 아주 확고한 신앙을 갖게 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거듭 깨닫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181쪽)
본인은 이 책을 나름대로 소화하여 오늘의 현실과 연결하려고 시도하였다. 때론 전문적인 용어들이나, 난해한 해석으로 인하여 내용 파악이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출발을 통하여 보다 나은 '영성'에로의 여정이 나에게 펼쳐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서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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