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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항해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우찌무라 간조/양혜원/홍성사/신동수
『내 영혼의 항해 일지』라는 부제를 단,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홍성사)를 읽었다. 내촌감삼 혹은 우찌무라 간조는 이 땅의 고민하는 기독인들 혹은 사상가들에게 이제까지 깊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김교신과 함석헌 선생 등은 그의 직계 제자들이었으며, 유영모 선생과 안창호 선생 등도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일제말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님이 조선장로교총회의 치리를 받을 때, 실상 신사참배 반대가 그 이유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찌무라 간조의 글을 읽었다는 이유로 치리를 받았다고 하니 우찌무라 간조와 한국교회와는 초기부터 이미 깊은 교감이 있어왔던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구리 두레교회의 김진홍 목사님도 신학도 시절부터 그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한국교회 전체가 그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기를 바란다고 서평한 것을 보았다.
우찌무라 간조는 1861년 에도에서 사무라이 가문의 한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자서전에서 어릴 적부터 전통적인 일본 신들을 섬기며, 아침저녁으로 신사와 우상에 절을 하였다고 고백한다. 신들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그는 사방으로 신들에게 절을 하였지만, 모든 신을 만족시키기에는 그의 작은 영혼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뇌한다. 그러던 참에 그는 17세에 뉴잉글랜드의 선교사, 윌리엄 클락이 세운 삿포로 농업대학에 관비생으로 입학하고, 그곳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비록 미션스쿨 안의 선배들의 강요 때문이기는 했지만, 그의 영혼은 기독교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다. 더 이상 수많은 신들을 만족시키지 않아도 되었고,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긴다는 것이 그에게는 새롭고 귀중한 진리였던 것이다. 그는 학교의 친구들과 함께 "우리들의 작은 교회"를 시작한다. 그것은 교파적 기독교 선교사들의 싸움으로 하나 되지 못하는 일본 기독교의 현실을 향한 비판이며, 참 기독교 공동체를 향한 대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처럼 그가 이루려는 새 교회가 전 일본을 복음화 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그의 새 교회뿐 아니라 전 일본 기독교인의 교회는 그리 성장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은사의 학교를 찾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아마도 참 기독교의 본질을 가장 기독교가 흥왕한 곳에서 배우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애머스트 대학을 졸업하고, 하트포드신학교에서 약 4개월간 신학수업을 한 후 28세에 일본으로 귀국한다. 그의 자서전은 이 때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으니, 그의 사상과 70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에 궁금하다면 그의 저작들을 마저 더 읽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의 전반기 생애의 자서전만을 읽고 그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면서도, 그의 사상의 편린들에서 오히려 커다란 흐름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그는 끊임없이 조국인 일본과 기독교와의 관계를 놓고 고민했다. 이미 삿포로 농업대학 시절부터 선교사들이 세운 이질적 교회를 극복하고, '대안교회', '새로운 교회' 운동을 시작했던 그였다. 그는 어찌하든지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물론 나중에는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한 선교적 열정으로 발전하지만-기독교회를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서구교회-특별히 미국 교파주의적 교회-의 축소판으로 불리며, 서구신학의 무분별한 수용자로 일컬어지는 한국교회를 돌아보게 한다. 선교 120년의 한국교회사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우리는 초창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들간의 갈등, 선교사와 한국인 목회지도자들과의 갈등, 한국인간의 갈등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 갈등의 축에는 교단과 교파의 헤게모니와 신학논쟁들이 놓여있다. 그러한 문제가 전 교회사적으로 없을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한국교회 안에서의 갈등의 중심에는 '조국-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투철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조선기독교'라는 하나의 뿌리를 내리려는 초기의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교사들과 초기의 기독교지도자들의 그러한 대국적 모임은 늘 '내 권리' '내 교파' '내 신학'만을 내세우는 것 때문에 무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다시 우찌무라 간조를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이미 100여년 전에 그의 조국과 기독교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한 그 기상을 사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을 위하여, 일본은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또한, 그의 이러한 생애의 숙원이 "일본을 성서 위에 세우자!"라고 하는 모토에 집약되어 있다. '성서일본'이라는 말만큼 그의 고민과 갈등의 해결책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기독교적 진리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아우를 수 있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이것이 비단 제자였던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에서만이 아니라, 그 어느 민족 누구에게라도 조국과 기독교간의 고민과 갈등 속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답은 그 말 자체로서는 매우 개신교적이다. 그 어떤 권위보다도 성경을 진리의 참된 표준으로 인정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또한 이것은 개혁주의적이다. '오직 성경'이라는 개혁주의자들의 첫 번째 모토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복음주의적이다. 성경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진리대로 살고자 하기에 그렇다. 우찌무라 간조의 신학적 내용은 이런 점에서 성경적이며, 복음적이다. 물론, 그가 세우려고 했던 교회가 기존의 교회조직과 체계를 넘어선 교회-무교회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회의적 시각에 일조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가 제시한 신학은 개혁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신학을 공부하며 그 공부에 빠져든 한 사람으로서, 성경의 바른 해석과 적용이 올바른 신학적 작업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부른 신학적 결정이나 고민 없는 신학적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본질적 가르침에 침착하고 그것으로 개인과 사회와 민족과 세계와 삶을 꿰뚫어 파악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그의 사상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는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악한 것을 더욱 악하게... 그리고 선한 것을 더욱 선하게"('귀향' 중에서)라고 말했다. 그것은 빛의 특성을 잘 이해한 말이다. 빛이 비췰 때, 어두운 곳은 더욱 어두워지고, 빛이 비춰지는 곳은 밝아진다. 그것은 진리의 속성이기도 하다. 나는 그가 파악한데로 이 민족의 선함이 성경적 진리로 말미암아 더욱 밝게 비춰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조국의 어두움과 악함이 더욱 더 진리의 빛으로 말미암아 그 부패한 것이 드러나게 되기를 희망한다.
성경의 사람들, 진리의 사람들은 모두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드러내고, 빛을 빛으로 드러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조국교회가 주의 진리의 빛의 담지자가 되기를 희망하며, 이 빛으로 조국을 비추고, 주께 드리게 되기를 기원한다.
(신동수)
『내 영혼의 항해 일지』라는 부제를 단,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홍성사)를 읽었다. 내촌감삼 혹은 우찌무라 간조는 이 땅의 고민하는 기독인들 혹은 사상가들에게 이제까지 깊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김교신과 함석헌 선생 등은 그의 직계 제자들이었으며, 유영모 선생과 안창호 선생 등도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일제말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님이 조선장로교총회의 치리를 받을 때, 실상 신사참배 반대가 그 이유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찌무라 간조의 글을 읽었다는 이유로 치리를 받았다고 하니 우찌무라 간조와 한국교회와는 초기부터 이미 깊은 교감이 있어왔던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구리 두레교회의 김진홍 목사님도 신학도 시절부터 그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한국교회 전체가 그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기를 바란다고 서평한 것을 보았다.
우찌무라 간조는 1861년 에도에서 사무라이 가문의 한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자서전에서 어릴 적부터 전통적인 일본 신들을 섬기며, 아침저녁으로 신사와 우상에 절을 하였다고 고백한다. 신들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그는 사방으로 신들에게 절을 하였지만, 모든 신을 만족시키기에는 그의 작은 영혼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뇌한다. 그러던 참에 그는 17세에 뉴잉글랜드의 선교사, 윌리엄 클락이 세운 삿포로 농업대학에 관비생으로 입학하고, 그곳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비록 미션스쿨 안의 선배들의 강요 때문이기는 했지만, 그의 영혼은 기독교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다. 더 이상 수많은 신들을 만족시키지 않아도 되었고,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긴다는 것이 그에게는 새롭고 귀중한 진리였던 것이다. 그는 학교의 친구들과 함께 "우리들의 작은 교회"를 시작한다. 그것은 교파적 기독교 선교사들의 싸움으로 하나 되지 못하는 일본 기독교의 현실을 향한 비판이며, 참 기독교 공동체를 향한 대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처럼 그가 이루려는 새 교회가 전 일본을 복음화 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그의 새 교회뿐 아니라 전 일본 기독교인의 교회는 그리 성장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은사의 학교를 찾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아마도 참 기독교의 본질을 가장 기독교가 흥왕한 곳에서 배우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애머스트 대학을 졸업하고, 하트포드신학교에서 약 4개월간 신학수업을 한 후 28세에 일본으로 귀국한다. 그의 자서전은 이 때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으니, 그의 사상과 70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에 궁금하다면 그의 저작들을 마저 더 읽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의 전반기 생애의 자서전만을 읽고 그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면서도, 그의 사상의 편린들에서 오히려 커다란 흐름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그는 끊임없이 조국인 일본과 기독교와의 관계를 놓고 고민했다. 이미 삿포로 농업대학 시절부터 선교사들이 세운 이질적 교회를 극복하고, '대안교회', '새로운 교회' 운동을 시작했던 그였다. 그는 어찌하든지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물론 나중에는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한 선교적 열정으로 발전하지만-기독교회를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서구교회-특별히 미국 교파주의적 교회-의 축소판으로 불리며, 서구신학의 무분별한 수용자로 일컬어지는 한국교회를 돌아보게 한다. 선교 120년의 한국교회사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우리는 초창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들간의 갈등, 선교사와 한국인 목회지도자들과의 갈등, 한국인간의 갈등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 갈등의 축에는 교단과 교파의 헤게모니와 신학논쟁들이 놓여있다. 그러한 문제가 전 교회사적으로 없을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한국교회 안에서의 갈등의 중심에는 '조국-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투철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조선기독교'라는 하나의 뿌리를 내리려는 초기의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교사들과 초기의 기독교지도자들의 그러한 대국적 모임은 늘 '내 권리' '내 교파' '내 신학'만을 내세우는 것 때문에 무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다시 우찌무라 간조를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이미 100여년 전에 그의 조국과 기독교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한 그 기상을 사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을 위하여, 일본은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또한, 그의 이러한 생애의 숙원이 "일본을 성서 위에 세우자!"라고 하는 모토에 집약되어 있다. '성서일본'이라는 말만큼 그의 고민과 갈등의 해결책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기독교적 진리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아우를 수 있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이것이 비단 제자였던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에서만이 아니라, 그 어느 민족 누구에게라도 조국과 기독교간의 고민과 갈등 속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답은 그 말 자체로서는 매우 개신교적이다. 그 어떤 권위보다도 성경을 진리의 참된 표준으로 인정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또한 이것은 개혁주의적이다. '오직 성경'이라는 개혁주의자들의 첫 번째 모토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복음주의적이다. 성경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진리대로 살고자 하기에 그렇다. 우찌무라 간조의 신학적 내용은 이런 점에서 성경적이며, 복음적이다. 물론, 그가 세우려고 했던 교회가 기존의 교회조직과 체계를 넘어선 교회-무교회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회의적 시각에 일조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가 제시한 신학은 개혁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신학을 공부하며 그 공부에 빠져든 한 사람으로서, 성경의 바른 해석과 적용이 올바른 신학적 작업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부른 신학적 결정이나 고민 없는 신학적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본질적 가르침에 침착하고 그것으로 개인과 사회와 민족과 세계와 삶을 꿰뚫어 파악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그의 사상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는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악한 것을 더욱 악하게... 그리고 선한 것을 더욱 선하게"('귀향' 중에서)라고 말했다. 그것은 빛의 특성을 잘 이해한 말이다. 빛이 비췰 때, 어두운 곳은 더욱 어두워지고, 빛이 비춰지는 곳은 밝아진다. 그것은 진리의 속성이기도 하다. 나는 그가 파악한데로 이 민족의 선함이 성경적 진리로 말미암아 더욱 밝게 비춰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조국의 어두움과 악함이 더욱 더 진리의 빛으로 말미암아 그 부패한 것이 드러나게 되기를 희망한다.
성경의 사람들, 진리의 사람들은 모두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드러내고, 빛을 빛으로 드러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조국교회가 주의 진리의 빛의 담지자가 되기를 희망하며, 이 빛으로 조국을 비추고, 주께 드리게 되기를 기원한다.
(신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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