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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
도발적인 책 제목 그래도 배울 것이 없진 않다
예수는 없다/오강남/현암사/신동수
오강남 교수의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공감이 간다. 특별히 현대 기독교회가 역사와 사회, 그리고 민족 앞에 떳떳하게 서 있지 못한 것을 질타하는 것에는 옷깃을 여미며 반성하며, 그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의 말을 한 마디로 잘라 무시하거나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전제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이 가진 해결책도 참된 해결책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한다.
결국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겸손히 함께 침묵하자! 우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예수를 찾을 수 있으며, 성경이 말하는 예수 밖에는 다른 예수는 없다. 그리고 참으로 그 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면 참된 개혁은 그리 멀지 않음을 믿는다!
● 저자 오강남
서울대학교 및 동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에서 종교학으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현재는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에서 종교학과 교수로 있다. 다른 저서로는 <도덕경>, <장자풀이>가 있고, 1987년 제17회 코리아타임스 한국현대문학 영문번역상(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 서평
요즘 책은 도발적인 제목이어야 잘 팔리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런 제목의 책들은 첫 눈에 호기심은 발동하지만 읽어보면 내용이 부실한 것들이 많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나 종교계열의 책도 한 눈에 들어오는 파격적인 문구로 치장한 것들이 속속 눈에 띈다. 수 년간 사회에서 일고 있는 반(反) 기독교 정서를 타고,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고취(?)시키는 도발적인 책 한 권이 있다. 캐나다에서 종교학과 교수로 있는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 이다. 어떤 이는 전 감리교 목사인 조찬선의 "기독교 죄악사"와 함께 읽을 것을 추천하며 유익할 것이라 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 에는 반드시 배울 것이 있다는 탈무드의 말이 기억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상기의 책들에서 분명 배워 유익을 얻을 것이 있음은 진리이다. 또한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의 정황과 처지에 따라 배우고 느끼는 감흥과 지식이 남 다를 것이다. 조찬선의 "기독교 죄악사"도 다소간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면이 없지 않다. 그의 기독교 비판에는 역사적 근거와 독선과 아집에 찼던 교회권력의 문제를 지적하는 혜안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회의 위기를 지켜보면서 나 또한 한 사람의 고민하는 크리스천으로서 그의 비판과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저자가 전달하려는 책의 결론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죄악사"는 현대 교회의 타락에 대해 그 원인을 교회의 출발에서부터 죄악으로 넘쳐 났음을 밝히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결국 기독교의 죄악이 이토록 넘쳐나니 전통적 기독교, 성경주의 기독교는 시대에 뒤떨어질 뿐이요, 전통적 기독교를 고수하느니 모든 종교 속에 녹아 있는 자비의 정신으로 기독교가 바뀌어야 하며,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결론은 전통적인 기독교회가 아닌 다원주의적 기독교 신앙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식은 공감하지만 그 해결책이 나와는 다른 것이다. 빈대 한 마리 나왔다고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있다. 이 비유가 과장된 것일까? 하지만, 교회의 비리를 몇 가지 캐어 냈다고 해서 기독교회 전체를 뽑아 내겠다는 것 같아 거북하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참 신앙과 사랑의 실천으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갔던 크리스천이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죄악과 문제 속에 싸여 있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더욱 '교회'다운 것이 아닌가? 교회에서 악인과 죄인을 발견할 수 없다면, 예수님이 거부하신 바리새인의 모임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거스틴도 도나투스파를 사랑하면서도 그들이 과도히 '죄 없는' 교회를 만들려고 한 것에 대해 비판했던 것이다. 교회는 죄인과 의인이 함께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곳이다. 아니, 루터의 그 유명한 말대로 모든 신자는 "의인이며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기에 도리어 끊임없이 주의 은혜대로 살 수 밖에 없으며, 칼빈의 말대로 "성화되어 가는 성도"가 아니겠는가? 결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글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성경적 기독교에도 답이 있다!" 는 것이다. 도올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글을 읽을 때에도 그러했고, 최근의 기독교 비판 서적에도 대응은 한결 같다. "해답은 있다!"
도발적인 책 제목 보다도 내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고 때로는 분노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책 제목보다 더욱 도발적인 답 글(reply)들이다. 어떤 글이든 한 자 한 자에는 그의 삶과 인격이 배인다. 어떤 글은 내 생각과 정서와 신념에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 또한 상대방에게는 맞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고유한 사상과 신념 - 특별히 그것이 활자화되어 공개되었을 시에는 - 은 단 몇 마디의 성의 없는 글로 매도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이런 행위는 죄악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격체이며, 하나님의 면류관이기 때문이다. 성의 없는 몇 마디 말과 글로 다른 사람의 노력과 성의, 그리고 인격을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의 면류관에 침을 뱉는 행위이다. 비록 그가 덜 기독교적이고, 덜 성경적이며, 때로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더더욱 기독교적이 아니다. 자기 딴에는 몇 마디 말로 상대방의 글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글이라는 것을 멋지게 드러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강준만 교수도 아니면서 몇마디 글로 강준만식 글쓰기라고 착각하지 말자.
그런데 과연 세상에 '일고' 의 가치도 없는 책들이 있는가? 내가 위에서 조찬선 목사의 글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는 어떤 책이나, 영화, 문화현상, 그리고 사조들(isms) 에 대해서 '일고'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소위 책과 영화를 포함한 사회와 문화 일반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대응은 결코 '분리' 나 '고립' 이 아닌 '전포괄적' 대응이다. 이것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이 세상 단 한 평의 땅도 주님께서 '이 곳은 내 땅이다'라고 주장하지 않는 곳은 없다!" 는 것의 의미이다. 기독교인의 문화변혁은 문화속에서 문화를 이해하고 그 문화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섣부른 '반문화'(against culture) 나 '친문화'(of culture)는 그 자체로 왜곡될 가능성이 더 높다.
많은 한국교회 크리스천들이 이원론적 반문화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조금이라도 교회(특히 자기 교회) 나 지도자(특히 자기 교회 목사)를 비난하거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글에 대해서 너무나 섣부르게 정죄하는 몇 마디 말로 잘라 버리는 경우가 많다. 분명한 믿음은 좋은 것이지만, 덮어놓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사도행전에도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noble character)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했다.(행 17:11) 영어성경에는 "...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true) 성경을 확인했다" 고 되어 있다.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것이 '분별' 이다. 어떤 글이나 사상을 접할 때, 그것이 사실인가, 진리인가, 그러한가?를 자세히 상고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본 후, 그것이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를 정당하게 밝히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 분별의 작업이며, 이 시대를 향한 크리스천의 책임 있는 자세이다.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나 학교, 모임에 있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같은 근본을 가지면서도 다른 지류를 인정해야 할 것이며, 다른 근본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들이 가진 오류를 그들이 사용하는 전제(presupposition) 로서 드러내어 주는 것이 책임 있는 진리의 담지자들이 할 일일 것이다.
이야기는 통한다 : 대화의 지속
전에 소위 자유주의적 장로교파 등에서 보수적 장로교단에 대해 "꼴통 보수"라는 닉네임을 불렀던 적이 있다. 매우 비하하는 이 말은 전통적인 보수교단의 대화 자세를 비꼬는 말이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19세기 역사적 자유주의의 발흥에 대한 소위 근본주의의 대응은 비슷한 유의 것이었다. 그 때 만들어진 근본주의 5대 강령이 있는데, '기적''동정녀 탄생' '부활' '재림' '축자영감' 등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성적, 과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경의 이 내용들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나중에는 '신화'(myth)라고 여겼지만, 근본주의자들은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했다. 그 과정 중에 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한 성경의 본문 비평학적 문제들에 대해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대화를 끊고 '따로 놀자!' 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중반 미국에서 나타난 '근본주의'였다.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승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통 기독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대화는 지속되었고, 소위 개혁주의 전통과 복음주의의 발현과 함께 더 이상 대화 단절의 해결책이 아닌, 적극적 변증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자유주의든 보수주의든 함께 성경의 비평학적 문제들과 씨름한다. 덮어놓고 믿는 신앙은 개혁주의와 복음주의도 거부하는 폐기물이다. 보수적 기독교 학자들은 더 이상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제 현대는 오히려 자유주의적 비평가들이 할 말이 없는 시대가 된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 진리로 믿기를 포기한 그들은 더 이상 성경을 본문(text)으로 삼지 못한다. 그들은 이제 성경 말씀으로 이야기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성경 말씀을 권위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의 최종 권위는 불트만과 틸리히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교육받은 자유주의자가 성경을 농밀하게 강해한 것을 볼 수 있는가? 그러나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키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호소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그것에 호소한다.
예수는 없다 :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 죄악사"가 다분히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기독교의 문제를 제기한 것과는 달리 근간의 "예수는 없다" 는 종교학적 근거를 가지고 기독교를 조망한다. 총 다섯 장으로 구분된 이 책에서 저자 오강남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믿음의 본질'과 '성경관' '신론' '기독론' '선교론' 등으로 크게 나누어 기독교를 해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결정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크리스천들이 믿는 예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위,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 문제가 대두된다. 이런 논쟁은 이미 100년도 더 된 구닥다리 논쟁이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야기는 분명 예수님의 전기나 다큐멘타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함께 했던 사도들(마태, 마가 - 마가 자신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으나 예수의 생애를 분명 목격했고,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의 제자로서 베드로의 구술을 복음서로 옮긴 것으로 가정할 때 사도적으로 구분됨, 요한)과 사도와 함께 했던 역사가(누가)에 의해 형성되어 가던 초기 기독교 교회 공동체에게 전해졌던 편지의 특징을 가진 목적이 가진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신학에서는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의 장르를 복음서(gospel)라고 부른다. 그런데 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최초 30년 후(마가) 그리고 60년 후(요한)에 씌어졌다. 또한 각 복음서 간에는 상당한 유사성과 함께 차이점들도 나타난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공관복음서 문제' 라고 한다. 요한복음은 더욱 다른 세 복음과는 근본적인 차이점들이 있다. 오강남 저자도 제시하지만, 복음서에는 문제가 곳곳에 드러난다.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는 다른가?" "왜 예수님 탄생이 헤롯대왕 죽기 직전(B.C.4) 과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한 호적 조사(A.D. 6)로 엇갈리는가?" "구약 어디에 메시아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할 것이라 기록되었는가?" 이 정도 문제는 기본적인 것이다. 성경의 본문과 씨름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문제들에 봉착한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현대적 해답은 그리 명쾌하지 않다. 그러나 세 가지 정도가 방법이 될 수 있다. 1) 문제임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믿는다. (근본주의) 2) 문제가 있으므로 새로운 신앙을 가진다.(오강남) 3) 문제를 직면하고 이해하여 믿는다.(개혁주의)
오강남 저자의 해결 방법은 이미 100여년 전 '역사적 예수'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의 후예들의 간단한 요약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성경 본문(복음서) 문제에 직면하여, '역사적 예수'와 '성경에서 제시하는 신앙의 예수'는 다른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결국 성경이란 역사적 예수가 사라진 후 30년에서 60년 후에 위기에 직면한 초대교회의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꾸미고' '조작하여' '편집한' 책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란 오류가 있는 책이며, 당대의 신앙을 위해 적절히 씌어진 책이 된다. 이러할 때, 굳이 성경의 내용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진다. 사실과 진리의 기록이 아니라, 단지 신앙을 함양을 위해 지어진 글일 뿐인데 말이다. 오강남은 여기서 더 이상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나, 대속하시는 주님이나, 부활하신 구세주 등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이제 예수를 성불한 부처요, 우리 모두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선각자나 모범 등으로 묘사한다. 그에게 다원주의적 사상가인 류영모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 간디 등이 위대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자신의 논의의 근본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 역시 '순환논리' 속에서 자기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성경을 대고 있다. 만약 그가 성경 이외의 다른 역사적이고 신빙성 있는 자료를 제시하며, '이것이 진짜 예수다!' 라고 말한다면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자기 스스로도 오직 '성경'으로 밖에는 예수를 말할 수밖에 없으면서, 진짜 예수, 역사적 예수 운운하며 예수가 없다고 말한다. 스스로 객관적 근거에 기반을 두지 않고 예수를 말하면서 진정한 예수를 말하고 있다. 혹은 그가 정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예수를 발견하려 했다면, 복음서 전체가 일관되게 (소소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전해주는 '예수'(네 가지 복음서, 한 분 예수님!)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예수가 없다고 말하려는 사람들이나 예수는 주시다라고 말하려는 사람들 모두가 '성경' 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재미있게도 저자 오강남의 문제제기는 나와 같은 보수적 목회자들이라면 신대원 1학년때 수업 받는 조직신학 서론 시간에 다 다루는 문제들이다. 구체적인 성경 본문의 주석은 신구약 주석시간에 심도 깊게 다룬다. 우리는 적어도 몇 가지 차이점과 오류처럼 보이는 문제들 때문에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다.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 속에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발견할 수 있고, 그 분이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이시다. 예를 들어 마태는 전통적 유대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는 다윗왕가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출생을 보았다. 예수님은 약속된 왕가의 메시아였던 것이다. 반면 헬라인이었던 누가는 소외된 사람들과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는 예수를 잉태했던 마리아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녀의 족보를 따라 예수의 기원을 살폈다. 엄밀하게 말해서 예수는 요셉의 피가 아닌 마리아의 피를 물려받지 않았는가? 마태와 마가는 분명 역사적 실체를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추적한 것이다. 때로 마태와 누가가 지시하는 예수님의 탄생 시기가 2000년이 넘어간 지금의 역사 환산법으로 다르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당대의 사람들에게 헤롯대왕의 즉위 기간은 그 아들의 왕위 기간과 겹칠 때도 있었고, 총독의 호구조사는 몇 년에 걸쳐서 산발적으로 시행되기도 했었다. 그런 역사적 증거는 성경을 지지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마지막으로 조금 어려운 문제가 마태가 어느 선지자를 걸고 나사렛 사람이라 칭한 것이다. 대부분의 관주성경은 이 구절을 이사야 11:1절로 지시한다. 그 구절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날 것이요" 인데, 그 싹의 음이 '나사렛' 과 비슷한 '네제르'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읽던 방식이었다. 예수님은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처럼 보잘 것 없는 동네 이방의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시며 활동하셨다는 것이 마태의 메시지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문제가 되는가? 마태는 예수님을 조작하였는가? 성경의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이 아닌가?
나가는 글 : 그래도 예수 밖에는 없다
앞에서 거듭 이야기하였지만, 나는 오강남 교수나 조찬선 목사의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 특별히 현대 기독교회가 역사와 사회, 그리고 민족 앞에 떳떳하게 서 있지 못한 것을 그들이 질타하는 것에는 옷깃을 여미며 반성하며, 그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들을 한 마디로 잘라 무시하거나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이 가진 해결책도 참된 해결책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한다. 결국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겸손히 함께 침묵하자! 우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예수를 찾을 수 있으며, 성경이 말하는 예수 밖에는 다른 예수는 없다. 그리고 참으로 그 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면 참된 개혁은 그리 멀지 않음을 믿는다!
오강남 교수의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공감이 간다. 특별히 현대 기독교회가 역사와 사회, 그리고 민족 앞에 떳떳하게 서 있지 못한 것을 질타하는 것에는 옷깃을 여미며 반성하며, 그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의 말을 한 마디로 잘라 무시하거나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전제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이 가진 해결책도 참된 해결책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한다.
결국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겸손히 함께 침묵하자! 우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예수를 찾을 수 있으며, 성경이 말하는 예수 밖에는 다른 예수는 없다. 그리고 참으로 그 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면 참된 개혁은 그리 멀지 않음을 믿는다!
● 저자 오강남
서울대학교 및 동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에서 종교학으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현재는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에서 종교학과 교수로 있다. 다른 저서로는 <도덕경>, <장자풀이>가 있고, 1987년 제17회 코리아타임스 한국현대문학 영문번역상(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 서평
요즘 책은 도발적인 제목이어야 잘 팔리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런 제목의 책들은 첫 눈에 호기심은 발동하지만 읽어보면 내용이 부실한 것들이 많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나 종교계열의 책도 한 눈에 들어오는 파격적인 문구로 치장한 것들이 속속 눈에 띈다. 수 년간 사회에서 일고 있는 반(反) 기독교 정서를 타고,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고취(?)시키는 도발적인 책 한 권이 있다. 캐나다에서 종교학과 교수로 있는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 이다. 어떤 이는 전 감리교 목사인 조찬선의 "기독교 죄악사"와 함께 읽을 것을 추천하며 유익할 것이라 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 에는 반드시 배울 것이 있다는 탈무드의 말이 기억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상기의 책들에서 분명 배워 유익을 얻을 것이 있음은 진리이다. 또한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의 정황과 처지에 따라 배우고 느끼는 감흥과 지식이 남 다를 것이다. 조찬선의 "기독교 죄악사"도 다소간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면이 없지 않다. 그의 기독교 비판에는 역사적 근거와 독선과 아집에 찼던 교회권력의 문제를 지적하는 혜안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시대의 교회의 위기를 지켜보면서 나 또한 한 사람의 고민하는 크리스천으로서 그의 비판과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저자가 전달하려는 책의 결론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죄악사"는 현대 교회의 타락에 대해 그 원인을 교회의 출발에서부터 죄악으로 넘쳐 났음을 밝히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결국 기독교의 죄악이 이토록 넘쳐나니 전통적 기독교, 성경주의 기독교는 시대에 뒤떨어질 뿐이요, 전통적 기독교를 고수하느니 모든 종교 속에 녹아 있는 자비의 정신으로 기독교가 바뀌어야 하며,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결론은 전통적인 기독교회가 아닌 다원주의적 기독교 신앙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식은 공감하지만 그 해결책이 나와는 다른 것이다. 빈대 한 마리 나왔다고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있다. 이 비유가 과장된 것일까? 하지만, 교회의 비리를 몇 가지 캐어 냈다고 해서 기독교회 전체를 뽑아 내겠다는 것 같아 거북하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참 신앙과 사랑의 실천으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갔던 크리스천이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죄악과 문제 속에 싸여 있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더욱 '교회'다운 것이 아닌가? 교회에서 악인과 죄인을 발견할 수 없다면, 예수님이 거부하신 바리새인의 모임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거스틴도 도나투스파를 사랑하면서도 그들이 과도히 '죄 없는' 교회를 만들려고 한 것에 대해 비판했던 것이다. 교회는 죄인과 의인이 함께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곳이다. 아니, 루터의 그 유명한 말대로 모든 신자는 "의인이며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기에 도리어 끊임없이 주의 은혜대로 살 수 밖에 없으며, 칼빈의 말대로 "성화되어 가는 성도"가 아니겠는가? 결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글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성경적 기독교에도 답이 있다!" 는 것이다. 도올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글을 읽을 때에도 그러했고, 최근의 기독교 비판 서적에도 대응은 한결 같다. "해답은 있다!"
도발적인 책 제목 보다도 내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고 때로는 분노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책 제목보다 더욱 도발적인 답 글(reply)들이다. 어떤 글이든 한 자 한 자에는 그의 삶과 인격이 배인다. 어떤 글은 내 생각과 정서와 신념에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 또한 상대방에게는 맞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고유한 사상과 신념 - 특별히 그것이 활자화되어 공개되었을 시에는 - 은 단 몇 마디의 성의 없는 글로 매도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이런 행위는 죄악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격체이며, 하나님의 면류관이기 때문이다. 성의 없는 몇 마디 말과 글로 다른 사람의 노력과 성의, 그리고 인격을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의 면류관에 침을 뱉는 행위이다. 비록 그가 덜 기독교적이고, 덜 성경적이며, 때로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더더욱 기독교적이 아니다. 자기 딴에는 몇 마디 말로 상대방의 글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글이라는 것을 멋지게 드러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강준만 교수도 아니면서 몇마디 글로 강준만식 글쓰기라고 착각하지 말자.
그런데 과연 세상에 '일고' 의 가치도 없는 책들이 있는가? 내가 위에서 조찬선 목사의 글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는 어떤 책이나, 영화, 문화현상, 그리고 사조들(isms) 에 대해서 '일고'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소위 책과 영화를 포함한 사회와 문화 일반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대응은 결코 '분리' 나 '고립' 이 아닌 '전포괄적' 대응이다. 이것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이 세상 단 한 평의 땅도 주님께서 '이 곳은 내 땅이다'라고 주장하지 않는 곳은 없다!" 는 것의 의미이다. 기독교인의 문화변혁은 문화속에서 문화를 이해하고 그 문화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섣부른 '반문화'(against culture) 나 '친문화'(of culture)는 그 자체로 왜곡될 가능성이 더 높다.
많은 한국교회 크리스천들이 이원론적 반문화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조금이라도 교회(특히 자기 교회) 나 지도자(특히 자기 교회 목사)를 비난하거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글에 대해서 너무나 섣부르게 정죄하는 몇 마디 말로 잘라 버리는 경우가 많다. 분명한 믿음은 좋은 것이지만, 덮어놓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사도행전에도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noble character)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했다.(행 17:11) 영어성경에는 "...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true) 성경을 확인했다" 고 되어 있다.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것이 '분별' 이다. 어떤 글이나 사상을 접할 때, 그것이 사실인가, 진리인가, 그러한가?를 자세히 상고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본 후, 그것이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를 정당하게 밝히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 분별의 작업이며, 이 시대를 향한 크리스천의 책임 있는 자세이다.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나 학교, 모임에 있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같은 근본을 가지면서도 다른 지류를 인정해야 할 것이며, 다른 근본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들이 가진 오류를 그들이 사용하는 전제(presupposition) 로서 드러내어 주는 것이 책임 있는 진리의 담지자들이 할 일일 것이다.
이야기는 통한다 : 대화의 지속
전에 소위 자유주의적 장로교파 등에서 보수적 장로교단에 대해 "꼴통 보수"라는 닉네임을 불렀던 적이 있다. 매우 비하하는 이 말은 전통적인 보수교단의 대화 자세를 비꼬는 말이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19세기 역사적 자유주의의 발흥에 대한 소위 근본주의의 대응은 비슷한 유의 것이었다. 그 때 만들어진 근본주의 5대 강령이 있는데, '기적''동정녀 탄생' '부활' '재림' '축자영감' 등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성적, 과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경의 이 내용들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나중에는 '신화'(myth)라고 여겼지만, 근본주의자들은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했다. 그 과정 중에 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한 성경의 본문 비평학적 문제들에 대해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대화를 끊고 '따로 놀자!' 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중반 미국에서 나타난 '근본주의'였다.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승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통 기독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대화는 지속되었고, 소위 개혁주의 전통과 복음주의의 발현과 함께 더 이상 대화 단절의 해결책이 아닌, 적극적 변증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자유주의든 보수주의든 함께 성경의 비평학적 문제들과 씨름한다. 덮어놓고 믿는 신앙은 개혁주의와 복음주의도 거부하는 폐기물이다. 보수적 기독교 학자들은 더 이상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제 현대는 오히려 자유주의적 비평가들이 할 말이 없는 시대가 된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 진리로 믿기를 포기한 그들은 더 이상 성경을 본문(text)으로 삼지 못한다. 그들은 이제 성경 말씀으로 이야기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성경 말씀을 권위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의 최종 권위는 불트만과 틸리히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교육받은 자유주의자가 성경을 농밀하게 강해한 것을 볼 수 있는가? 그러나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키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호소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그것에 호소한다.
예수는 없다 :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 죄악사"가 다분히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기독교의 문제를 제기한 것과는 달리 근간의 "예수는 없다" 는 종교학적 근거를 가지고 기독교를 조망한다. 총 다섯 장으로 구분된 이 책에서 저자 오강남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믿음의 본질'과 '성경관' '신론' '기독론' '선교론' 등으로 크게 나누어 기독교를 해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결정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크리스천들이 믿는 예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위,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 문제가 대두된다. 이런 논쟁은 이미 100년도 더 된 구닥다리 논쟁이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야기는 분명 예수님의 전기나 다큐멘타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함께 했던 사도들(마태, 마가 - 마가 자신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으나 예수의 생애를 분명 목격했고,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의 제자로서 베드로의 구술을 복음서로 옮긴 것으로 가정할 때 사도적으로 구분됨, 요한)과 사도와 함께 했던 역사가(누가)에 의해 형성되어 가던 초기 기독교 교회 공동체에게 전해졌던 편지의 특징을 가진 목적이 가진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신학에서는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의 장르를 복음서(gospel)라고 부른다. 그런데 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최초 30년 후(마가) 그리고 60년 후(요한)에 씌어졌다. 또한 각 복음서 간에는 상당한 유사성과 함께 차이점들도 나타난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공관복음서 문제' 라고 한다. 요한복음은 더욱 다른 세 복음과는 근본적인 차이점들이 있다. 오강남 저자도 제시하지만, 복음서에는 문제가 곳곳에 드러난다.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는 다른가?" "왜 예수님 탄생이 헤롯대왕 죽기 직전(B.C.4) 과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한 호적 조사(A.D. 6)로 엇갈리는가?" "구약 어디에 메시아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할 것이라 기록되었는가?" 이 정도 문제는 기본적인 것이다. 성경의 본문과 씨름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문제들에 봉착한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현대적 해답은 그리 명쾌하지 않다. 그러나 세 가지 정도가 방법이 될 수 있다. 1) 문제임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믿는다. (근본주의) 2) 문제가 있으므로 새로운 신앙을 가진다.(오강남) 3) 문제를 직면하고 이해하여 믿는다.(개혁주의)
오강남 저자의 해결 방법은 이미 100여년 전 '역사적 예수'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의 후예들의 간단한 요약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성경 본문(복음서) 문제에 직면하여, '역사적 예수'와 '성경에서 제시하는 신앙의 예수'는 다른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결국 성경이란 역사적 예수가 사라진 후 30년에서 60년 후에 위기에 직면한 초대교회의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꾸미고' '조작하여' '편집한' 책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란 오류가 있는 책이며, 당대의 신앙을 위해 적절히 씌어진 책이 된다. 이러할 때, 굳이 성경의 내용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진다. 사실과 진리의 기록이 아니라, 단지 신앙을 함양을 위해 지어진 글일 뿐인데 말이다. 오강남은 여기서 더 이상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나, 대속하시는 주님이나, 부활하신 구세주 등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이제 예수를 성불한 부처요, 우리 모두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선각자나 모범 등으로 묘사한다. 그에게 다원주의적 사상가인 류영모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 간디 등이 위대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자신의 논의의 근본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 역시 '순환논리' 속에서 자기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성경을 대고 있다. 만약 그가 성경 이외의 다른 역사적이고 신빙성 있는 자료를 제시하며, '이것이 진짜 예수다!' 라고 말한다면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자기 스스로도 오직 '성경'으로 밖에는 예수를 말할 수밖에 없으면서, 진짜 예수, 역사적 예수 운운하며 예수가 없다고 말한다. 스스로 객관적 근거에 기반을 두지 않고 예수를 말하면서 진정한 예수를 말하고 있다. 혹은 그가 정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예수를 발견하려 했다면, 복음서 전체가 일관되게 (소소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전해주는 '예수'(네 가지 복음서, 한 분 예수님!)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예수가 없다고 말하려는 사람들이나 예수는 주시다라고 말하려는 사람들 모두가 '성경' 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재미있게도 저자 오강남의 문제제기는 나와 같은 보수적 목회자들이라면 신대원 1학년때 수업 받는 조직신학 서론 시간에 다 다루는 문제들이다. 구체적인 성경 본문의 주석은 신구약 주석시간에 심도 깊게 다룬다. 우리는 적어도 몇 가지 차이점과 오류처럼 보이는 문제들 때문에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다.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 속에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발견할 수 있고, 그 분이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이시다. 예를 들어 마태는 전통적 유대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는 다윗왕가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출생을 보았다. 예수님은 약속된 왕가의 메시아였던 것이다. 반면 헬라인이었던 누가는 소외된 사람들과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는 예수를 잉태했던 마리아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녀의 족보를 따라 예수의 기원을 살폈다. 엄밀하게 말해서 예수는 요셉의 피가 아닌 마리아의 피를 물려받지 않았는가? 마태와 마가는 분명 역사적 실체를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추적한 것이다. 때로 마태와 누가가 지시하는 예수님의 탄생 시기가 2000년이 넘어간 지금의 역사 환산법으로 다르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당대의 사람들에게 헤롯대왕의 즉위 기간은 그 아들의 왕위 기간과 겹칠 때도 있었고, 총독의 호구조사는 몇 년에 걸쳐서 산발적으로 시행되기도 했었다. 그런 역사적 증거는 성경을 지지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마지막으로 조금 어려운 문제가 마태가 어느 선지자를 걸고 나사렛 사람이라 칭한 것이다. 대부분의 관주성경은 이 구절을 이사야 11:1절로 지시한다. 그 구절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날 것이요" 인데, 그 싹의 음이 '나사렛' 과 비슷한 '네제르'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읽던 방식이었다. 예수님은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처럼 보잘 것 없는 동네 이방의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시며 활동하셨다는 것이 마태의 메시지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문제가 되는가? 마태는 예수님을 조작하였는가? 성경의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이 아닌가?
나가는 글 : 그래도 예수 밖에는 없다
앞에서 거듭 이야기하였지만, 나는 오강남 교수나 조찬선 목사의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 특별히 현대 기독교회가 역사와 사회, 그리고 민족 앞에 떳떳하게 서 있지 못한 것을 그들이 질타하는 것에는 옷깃을 여미며 반성하며, 그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들을 한 마디로 잘라 무시하거나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이 가진 해결책도 참된 해결책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한다. 결국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겸손히 함께 침묵하자! 우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예수를 찾을 수 있으며, 성경이 말하는 예수 밖에는 다른 예수는 없다. 그리고 참으로 그 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면 참된 개혁은 그리 멀지 않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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