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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서평

계산된 부흥주의와 성령의 강권적인 부어주심

북뉴스 | 2005.06.24 02:15
계산된 부흥주의와 성령의 강권적인 부어주심 부흥과 부흥주의/이안 머레이/부흥과개혁사/[권지성]

이안 머레이의 충격적인 부흥에 대한 증언들이 담겨 있는 <부흥과 부흥주의>가 부흥과 개혁사에서 새롭게 나왔다. 이안 머레이(1931~)는 로이드 존스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사역하기도 했으며, <The Banner of Truth Trust>를 세워 청교도 신학자들의 저서와 전기문의 발행으로 개혁 신학의 붐을 일으킨 신학자이다. 그는 이미 전작 <Pentecost, today>로 올바른 부흥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의 관점에서 서술한 바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많은 혼란을 겪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믿고 있던 부흥관과 18세기 부흥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부흥관이 너무나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고 느끼는 은혜와 부흥이라는 것이 상당한 부분에서 교묘히 계산되고 조작된 것이라는 저자의 숨은 의도를 간파하고 나면 씁쓸함과 함께 칼빈주의에 대적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이 책은 우리의 거짓된 부흥주의를 폭로한다. 이안 머레이는 그 근원이 되는 18세기 후반의 감리교 알미니안주의와 19세기 초반의 찰스 피니의 소위 강단 초청과 그의 사상 배후에 깔려 있는 근원을 조사하여 이 후, 미국 교회의 복음주의의 흐름이 인간 중심 사상으로 바뀌었음을 역설한다. 바로 인간 편에서 믿기로 결정하고 행동을 보여주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알미니안주의가 교회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15분, 10분, 5분 내에 고백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식의 카운트를 하며 회중들을 선동하여 이에 동조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았다는 식의 이 당시 복음 전도 방식은 경악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은 부흥과 부흥주의의 차이점,  발생과 그 원인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당시의 미국 복음주의의 생성 과정에서 찾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부흥의 변천 단계를 크게 3 단계로 나누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부흥이 유일한 부흥관인 시기이다. 부흥이란 하나님의 광대하신 영이 편만히 부어짐으로써, 교회에 믿는 무리가 더해지는 역사라는 견해를 따른 시기이다. 즉, 부흥은 소낙비와 같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 하나님의 강권적인 분출과 강림으로 묘사되어진다. 둘째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부흥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부흥주의의 등장이다. 1830년 이전의 분별없는 야외 집회와 일정기간 계속되는 신앙 부흥 집회에서 그들은 구도좌석에 즉각적으로 앉을 것을 요구하였고, 이것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여기었다. 셋째, 1958부터 현재까지 우리는 부흥과 부흥주의를 구별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첫째,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어주심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노버의 부흥을 주도한 새무엘 데이비스(1723~1761년)의 사역은 바로 참 부흥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으심과 역사하심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프린스턴 대학과 펜실베니아 서부 지역의 부흥, 1780년대 버지니아 부흥, 아키발더 알렉산더와 그레이엄에 의한 장로교의 부흥은 제 2차 영적 대각성 운동(1800~1825)과 함께 참 부흥의 특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준다. 특히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이 시기의 경건한 하나님의 설교자들이었다. "나에게는 아주 적은, 정말 아주 적은 신앙이 있습니다. 나는 아마도 3~4개월에 한 번 정도 정말 내가 소원하는 만큼의 능력으로 설교한 것 같습니다. 은혜로우신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주 변덕부리는 나로서는 정말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나는 기껏해야 그리스도 교회의 촛대에 연기 나는 심지이며 꺼져 가는 촛불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이 타락한 마음의 심지에 임할 때 그것은 떨리게 되고 새롭게 되고 감화되며 가끔씩 생명이 끝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변덕스럽고 작은 신앙만이 존재하며, 스스로를 “꺼져가는 촛불”에 비유한 사무엘 데이비서의 겸손한 고백은 교만한 나의 마음을 꾸짖는 듯하다. “참된 경건은 목사가 전하는 복음과 교훈에 형언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실어준다. 거룩한 삶은 심장에 전달되며 심장을 사로잡는다.”라는 프린스턴 학장이었던 위더스푼의 말을 통하여 나는 거룩한 삶과 경건이 학문적인 지식에 앞서 가장 중요한 사역자들과 설교자들의 요건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깨닫게 되었다. 윌리엄 그레이엄의 사역은 또한 나에게 목석 같은 설교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면 놀랍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 주었다. 그는 분명 1789년 부흥을 경험하기 이전에도 능력 있는 목회자 였으나, 알렉산더의 증언과 같이 부흥의 시기에 그는 그 어떠한 당대의 설교자보다 더욱 강력한 설교자가 되었다. 페이슨은 위대한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설교자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나는 내 마음이 통회하기 전까지, 회개함으로 내 마음이 복종 되고 녹기 전까지, 마치 내 영혼이 지금 막 용서를 받은 것 같이 느끼지 전까지 그리고 내 마음이 부드러움과 연민으로 가득 차기 전까지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설교하기에 합당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페이슨의 이 말에 진심으로 동의하고 느낀다. 특별히 이 시기에는 어떤 특별한 부흥을 위한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임재하심에 의한 죄인의 각성과 중생과 회심의 급진적인 진행만이 존재하였다. 여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과 이 시기 사람들이 생각한 부흥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부흥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이지, 우리가 무엇인가를 노력하여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비상한 인식과 하나님의 은혜의 부으심이 부흥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시기였다. 둘째, 부흥은 인간에 의해서 다시 반복적으로 임할 수 있다는 부흥부의(1858~1958)가 지배한 시기이다. 이것은 켄터키의 부흥(1800년)으로 인하여 발현한 부흥주의의 영향이다. 켄터키의 야외 집회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야외 집회에 신령한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여기에다가 이른바 “강단 초청”에 의해 회심한 사람들의 수를 세기 시작하면서 인간 중심적인 회심론을 바탕으로 한 알미니안 주의가 미국 교회 내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찰스 피니는 “당신이 부흥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단지 당신이 부흥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당시의 설교가들이 부흥을 원하지 않고 타락하였기 때문에 부흥이 오지 않은 것으로 구학파의 견해를 따르던 설교가들을 매도해 버렸다. 이것은 결국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우스가 주장한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교리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인 주장이었던 것이다. 부흥주의는 계산적인 방법으로 부흥이 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사람들이 애쓰고 힘쓰고 갖가지 전도 집회와 간증집회와 행사 프로그램과 인간의 활동과 의지로 다시 하나님을 동원할 수 있다라고 믿는 것이다. 부흥주의는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방언하고 예언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능히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찰스 피니의 생각이 나에게 상당 부분이 녹아 있음을 알고 참으로 놀랍고 공포스러웠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그 뿌리에는 내가 할 수 있다는 교만의 뿌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흥주의의 시대 정신은 반지성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성경의 교리와 진리는 땅에 묻어버리라는 것이다. 지성만을 추구하고 경험을 멸시하는 시대 풍조도 잘못된 것이지만, 진리의 분별없는 경험은 광신주의로 흐를 것이다. 이러한 피니로 인한 부흥주의 광범위한 유포는 장로교와 침례교의 분열을 가져왔고, 잘못된 방법임에도 결과적인 사역의 성공으로 인하여 부흥주의는 미국 복음주의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결국 부흥주의의 목적은 단순히 영혼을 얻는 것이지만,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 시기의 동북부 지역 지도자 5인의 삶과 사역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인위적인 방법에 의한 사람의 수적 증가가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할 수 있으면 죄인된 자신이 더욱 그리스도를 닮으려 하였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 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르짖음 속에도, 지진이나 불 가운데서도 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다면 그 어떤 효과적인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소리는 단지 사람을 향해 말씀하시는 소리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심령 내부 깊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위의 글은 페이슨이 행한 설교에서 인용한 것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뭔지 모를 마음의 짖누르는 듯한 부담감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첫째는 이러한 부흥에 대한 역사적인 논쟁은 내 영혼 안에서 거짓되고 쓸데없는 에너지만을 낭비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논쟁으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으로 정결케 되는 것이다.”라는 한 설교자의 말은 내 안에 논쟁을 위한 끝없는 논쟁을 종식시키게 한다. 이 책을 읽고 지나치게 논쟁에 집착하기 보다는 올바른 하나님의 부어주심을 바라보기로 결심하였다. 진리에 대한 투철하고 직접적인 논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한 삶과 성령의 충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제 일의 근본을 들었으므로 더욱 겸손하게 엎드려서 성경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는 것이다. 멸망 당할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던 주님처럼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나의 철광석 같은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부어져 하나님의 나라가 놀랍게 확장되어지는 것을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저자의 바탕에 깔려 있는 청교도적인 사상은 우리가 믿기 위해 선택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생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물론, 단순히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현대 복음 증거 방식에는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필자는 선교 단체 출신으로 “사영리”와 같은 전도의 방식을 굳게 믿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방법이 성경적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방법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전도하면서 한 번도 인간이 자신의 죄인 됨을 뼈저리게 깨닫지 않으면 은혜를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 하나님의 빛의 비추심에 의한 중생과 거듭남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라 부를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견고히 믿고 있다. 다만, 부흥이 지나간 자리에 형식적인 부흥주의만 남은 것처럼,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 전도의 방법만 성행하는 현재의 행태는 부끄러운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부흥주의의 발현과 폐해에 대해 동의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평신도 사역자들의 등장이 마치 새로운 학문의 조류와 부흥주의로 인해서 야기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평신도 사역자들의 두드러진 출현은 선교와 전도를 향한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과 부흥으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전 세계에 수많은 평신도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은 바로 부흥의 소산물들이며, 그들은 목회자의 이름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들의 영향력의 약화에 부흥주의의 폐단이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자만, 평신도 사역자 시대의 도래를 이러한 폐단의 하나로 여겨서는 안된다. 저자는 참 훌륭한 부흥 신학자이며, 전기 작가임에 분명하다. 저자가 신학적인 논증에 초점을 맞추어서 조금은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바라기는 학문적인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대립 구조나 구학파와 신학파의 대립으로 몰고 가지 말고 칼빈주의의 바탕에서 알미니안주의 속에 있는 칼빈주의를 해석하려는 입장을 취했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찰스 피니, D.L. 무디, 빌리 그래함 모두 부흥의 시대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전체 삶을 놓고 평가되어야지 부흥주의라는 부분 하나만을 놓고 칼질하려 해서는 안된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방대한 미국 교회 역사 속에 일어난 부흥을 다루는 이 책은 부흥주의의 근원을 살펴, 오늘날의 상황을 진단케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통찰력 있는 중요한 저서이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오염된 교리와 잘못된 부흥관에 수긍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제 부흥의 이야기를 듣고 분별이 끝난 성도라면, 하나님의 손에 의한 하늘을 가르며 임하실 성령의 부으심을 간절히 구하자. 우리가 오게 할 수 없고, 만들 수 없고 조작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부흥이기에 이것을 달라고 이 땅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시기 때문이다. 저자 이안 머리(Iain H. Murray)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전기 작가이자 부흥신학자로서 로이드 존스, 존 머리, 찰스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 등의 여러 영적 거인들에 대한 전기를 썼으며,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청교도 종말관]등의 청교도와 부흥에 관련된 여러 저서들을 집필했다. 1931년 영국 랭커셔에서 출생해 더람 대학교에서 수학한 이안 머리는 청교도와 부흥신학에 해박하나 지식을 가진 장래성 있는 인재로 주목받아 로이드 존스에게 발탁되어 1956~1959년까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로이드 존스를 도와 사역하기도 했고, 이후 런던과 시드니에서 10여 년 목회를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안 머리는 1957년, 잭 쿠럼과 함께 '진리의 깃발사'를 공동 설립하여, 지금까지 대표로 있으면서 개혁 및 청교도 전문서적 출판을 통해 20세기 후반 개혁신학, 청교도 신학, 부흥신학의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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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의 주인인가? 누가 우리의 주인인가?
에베소에서 보낸 일주일
데이비드 드실바/이여진/이레서원/정현욱 편집인


  AD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의 디토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2차 3차 전쟁을 일으켰다. 운이 나빴던 것일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린 것일까? 이스라엘은 결코 예루살렘을 회복하지 못했고, 2000년의 방랑 생활이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소아시아로 로마로 북아프리카로 흩어졌다. 유대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유대인들의 운명과 같이했다. 아니 더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공식 종교로 인정받기 전까지 말이다...
누구나 한번쯤 가졌을 법한 질문 누구나 한번쯤 가졌을 법한 질문
질문 마태복음
왕인성/두란노/서상진 편집위원


 성경을 읽어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수천 년 전의 문화와 시대적, 정치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사건을 하나 알기 위해서 사건과 연관된 여러 가지 정황들을 알아야 하듯이, 성경도 우리에게 그런 정황들을 요구한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그래도 우리가 실제적으로 살아온 전통에 익숙하기 때문에, 전통을 기반으로 접근을 하면,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특히 구약의 시대적인 상황은 기원전의 일이다. 고대 ...
상처입은 손을 내밀다 상처입은 손을 내밀다
몸을 돌아보는 시간
조희선/사자와 어린양/문양호 편집위원


목회라는 길에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아프신 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런 분들 중 특별한 케어가 필요한 분이라고 생각되면 그분의 이해를 위해 자료를 찾고 그에 관계된 책을 여러 권 읽곤 한다. 교회 내에 있던 자폐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를 위해 거의 십여 권 이상을 읽은 기억이 난다. 몇 년째 상담하는 형제의 정신질환을 위해서도 그러했다. 동성애에 관련해서도 그러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자료를 찾아 읽고 해도 그것은 한계를 가진다. 그 병을 앓고 있는 이가 아니라면 제대로 된 이해나 아픔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에 깊이 빠져들다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에 깊이 빠져들다
온유하고 겸손하니
데인 오틀런드/조계광/개혁된실천사/조정의 편집위원


이 책은 2020년 ACBC(Association of Certified Biblical Counselors)에서 선정한 최고의 책 중 하나다.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블로거로 많은 서평을 남긴 팀 챌리스는 이 책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고 사랑하고 신뢰하도록 돕는 책”이라고 평가했다. D. A. 카슨, 러셀 무어, 마이클 리브스, 폴 트립, 브라이언 채플 등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기독교학자, 상담가, 목사 등이 추천하면서 극찬한 책이다. 하지만 한편 존 맥아더 목사 기관 사역인 Grace to You 블로그에서 한 기고자가 남...
새로운 목회자가 오고 있다 새로운 목회자가 오고 있다
우리는 일하는 목회자입니다
김재완/이레서원/방영민 편집위원


새로운 목회자가 오고 있다  한국교회는 ‘포스트-성장’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코로나를 겪으며 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위치를 재정비하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교회가 예수님이 펼치셨던 치유와 가르침과 축귀의 사역을 이어가기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다. 대형화되고 상업화되고 기업화된 교회는 과연 성경적일까? 그렇다고 소형화되고 전통적인 교회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회에도 “부익부빈익빈”이라는 극심한 양극화가 있듯 교회도 심각한 양극화가 있다는 것이다. 일...
책으로 가보는 초대교회 성지여행 책으로 가보는 초대교회 성지여행
바울과 함께 걸었네
함신주/아르카/서상진 편집위원


기행문을 읽을 때마다 마치 그곳에 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저자가 그곳에 가서 느낀 마음과 그곳에서 주는 감동, 그리고 그 장소에서 있었던 다양한 역사적인 사건과 상황들은 독자로 하여금 마치 그곳에 가 있는 듯한 생각을 가져다주고, 또한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을 더욱 부풀게 한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서 국외 여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가고 싶은 곳의 기행문을 찾아서 읽으며, 앞으로 그곳을 가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함신주 목사님이 작년에 교회 성도들과 함께 한 터키와 그리스를 방문하고 블로그에 기록...
크리스천이여, 적극적으로 문화에 참여하라 크리스천이여, 적극적으로 문화에 참여하라
복음과 문화 사이
대니얼 스트레인지/정성묵/두란노/조정의 편집위원


이 책을 소개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저자 대니얼 스트레인지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안을 보지’ 않고도 세상 ‘안에’ 있을 수 있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닮지 않고도 세상 ‘안에’ 있을 수가 있다. 분노와 자기 의가 아닌 진리와 은혜로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신이 팔려 어리둥절해서 아무것이나 받아들이는 대신, 문화를 잘 소비하는 것이 가능하다. 텔레비전을 보고 소설을 읽고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믿음이 시들기는커녕 더 좋아지는 것이 가능하다. 당신(그렇다, 바로 당신!)이 친구와 지난...
개혁신학의 뿌리를 알려면 이 책을 읽으라! 개혁신학의 뿌리를 알려면 이 책을 읽으라!
개혁신학의 뿌리 츠빙글리를 읽다
주도홍/세움북스/신동수 편집위원


저자인 주도홍 교수님에게 신대원 3년 동안 역사신학을 사사 받았던 제자로서 실로 20여 년 만에 선생님의 책을 특별한 선물로 받아 읽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역사가이면서도 목회자인 교수님은 신대원 수업 시절 교의학과 사료 사이의 치열한 1차 자료 읽기와 해석 중에도 개혁파 선진들의 믿음의 각성과 영적 교훈을 부각하시며 자주 그것을 "천국 맛뵈기"라고 하셨고, 예의 이 책에서도 츠빙글리 읽기의 결론 부분을 "천국 맛보기"라 명명합니다(pp. 352-3).   최근 신학 서적을 거의 읽지 못하던 게으른 목사인 저에게 본서가...
현대인을 위한 기독교가 될 수 있을까? 현대인을 위한 기독교가 될 수 있을까?
모두를 위한 기독교교양
손성찬/죠이북스/방영민 편집위원


  현대인을 위한 기독교가 될 수 있을까?   서론   대선을 지나며 언론에 등장하는 기독교와 교회의 뉴스가 성도의 마음을 복잡하고 부끄럽게 만들고 일반사회와 시민들까지 불편하고 황당하게 만든다. 기독교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생명이 걸려 있는 코로나시국에 예배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하는 정부를 향해 여전히 기독교 핍박과 탄압이라고 부르짖는다. 의료와 보건과 공무를 위해 수고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지는 못할망정 우리를 공격하는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어느 종교나 자신들이 믿...
예수님 보폭에 삶의 걸음 맞추기 예수님 보폭에 삶의 걸음 맞추기
슬로우 영성: 영적 무감각에 빠뜨리는 바쁨을 제거하라
존 마크 코머/정성묵/두란노/조정의 편집위원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지도 십수 년이 지난 것 같다. ‘단순한 삶’, ‘느리게 사는 삶’, ‘심플 라이프’라는 말이 아직도 유행하는 걸 보면, 현대인은 여전히 바쁜 삶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느리게 산다는 것의 참 의미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쉬는 것 혹은 단순한 생각에 집중하며 명상에 잠기는 것, 평소에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누리며 즐기는 것. 뭐든 바쁜 일상을 잊게 해주는 무언가라고 생각하기 쉽다.하지만 저자 존 마크 코머는 예수님을 닮은 삶이 바로 느리게 사는 삶이라고...
분노 속에 감춰진 당신의 욕망을 치료하는 하나님 분노 속에 감춰진 당신의 욕망을 치료하는 하나님
당신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는 분노
크리스토퍼 애쉬, 스티브 미즐리/이지혜/생명의말씀사/조정의 편집위원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늘어나는 문제 중 하나는 ‘분노’의 문제다. 재택근무로 집에 남편이 머물면서 아내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하는 사례나 부부 및 가족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문제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코로나가 분노를 유발하는 인자가 있는 바이러스라 그런 게 아니다. 죄인의 본성에 새겨진 분노 인자가 더 자주 자극을 받기 때문에 그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도 분노가 문제라는 걸 안다. 그래서 어떻게든 분노를 조절하려 애쓰고 약을 처방하고 분노 조절 장애라는 병명도 붙이면서 분노라는 감정을 처분하...
마지막 남겨진 불씨까지 마지막 남겨진 불씨까지
윗필드씨 제발 마이크 내려 놓고 쉬세요
아놀드 A. 댈리모어/오현미/이레서원/정현욱 편집인


 조지 윗필드는 언급하지 않고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대부흥운동을 논하기를 불가능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록한 자의 승리이기도 하다. 당대에는 웨슬리 형제보다 월등한 인기와 능력, 영향력을 끼쳤지만 안타깝게 조지 윗필드는 기록하지 않았고, 웨슬리는 기록했다. 결국 18세기 영국 대각성 운동의 승자라는 웨슬리로 기억한다. 존 웨슬리기 조지 윗필드보다 뛰어나다 기억하게 된 것은 그의 두 가지 업적 때문이다. 하는 그의 조직력과 다른 하나는 그의 기록이 남겨졌기 때문이다. 현재도 존 웨슬리...
2084, 미래는 바라보는 복음의 시선 2084, 미래는 바라보는 복음의 시선
2084: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존 C. 레녹스/이우진/한국장로교출판사/조정의 편집위원


책 제목이 특이하다, “2084.” 공상과학 소설이나 미래 전망 보고서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저자는 존 C. 레녹스다. 옥스포드 대학교 수학과 교수이면서 대표적인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과 공개토론을 벌였던, 과학, 철학, 신학의 총체적 진리로 기독교를 변증하는 대표적인 기독교 지성인이다. <두려움 없는 복음 전도>, <코로나바이러스 세상,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현대 무신론자들의 헛발질> 등으로 2020년 후반에...
언제나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려면 기도 먼저! 언제나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려면 기도 먼저!
바빠도, 힘들어도, 슬퍼도 기도 먼저
J. D. 그리어/정성묵/두란노/조정의 편집위원


기도에 관한 책은 정말 많다. 주기도문을 설명한 책도 정말 많다. 그럼에도 기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계속 잊어버리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구했던 것처럼 우리는 기도의 가르침이 언제나 필요하다. 지식적인 교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순종의 삶을 위해서.J. D. 그리어가 <기도 먼저: Just Ask>라는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도의 우선성에 있다. “바빠도, 힘들어도, 슬퍼도 기도 먼저”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언제 어디서든 일단 구하라는 것이다. 기도 먼저 하라는 것이다. 그리어는 서밋...
1세기 기독교 탐구, 우리의 신학자가 한 걸음을 1세기 기독교 탐구, 우리의 신학자가 한 걸음을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
박영호/IVP/고경태 편집위원


1세기 기독교에 대한 연구 도서는 대부분 해외 신학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 나라 신학자 박영호 목사가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IVP, 2021년)라는 제목으로 1세기 교회에 대한 연구물을 출판하였다. 기독교 근원에 대한 연구가 우리 학자의 손에서 출판되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박영호 목사는 시카고 대학에서 초기 기독교 문서를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런데 교수 연구자가 아닌 목사로 활동하는 것도 특이한 모습이다. 목회 활동과 함께 매우 전문적인 학술 업적을 발간한 것은 도전적인 모습일...
성경 속의 하늘을 명징하고 예리하게 파헤친 역작 성경 속의 하늘을 명징하고 예리하게 파헤친 역작
마침내 드러난 하늘나라
폴라 구더/이학영/학영/정현욱 편집인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편은 시편 1편입니다. 물론 23편도 좋아하지만 1편은 묵상하면 할수록 기이하고 놀라운 시편이란 생각이 절로 듭니다. 만약 제가 시편 1편의 제목을 짓는다면 ‘하늘에 뿌리 내린 삶’이라고 짓고 싶습니다. 시편 1편은 강가에 옮겨진 나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천착한 삶의 경이에 대해 풀어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뿌리 내려야할 곳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인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존재이기에 육으로만 살 수 없으며, 철저히 영적 채움을 통해 살아갑니다. 하늘의 계시를 따르는 이들이 받는 영적 복을 설명합니다.폴...
미디어 시대, 영혼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나? 미디어 시대, 영혼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나?
스펙터클 문화 속의 그리스도인
토니 레인키/조계광/개혁된실천사/조정의 편집위원


1999년, 인터넷에 접속하여 이메일 계정을 만드는 것이 대학교 과제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어린아이도 유튜브에 접속하여 자신이 원하는 영상을 즐겨보는 시대가 되었다. 원하는 영상물을 보려면 비디오 가게에 가서 직접 빌려야 했는데, 지금은 손바닥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으로 언제든 원하는 영상물을 결제하고 시청할 수 있다.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미디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고, 앞으로는 어떤 미디어 매체가 개발되어 더 많은 미디어를 더 높은 빈도와 강도로 경험하게 될지 알 수 없다. 토니 레인키는 이런 문화 현상을 “스펙터클”이라 부른다...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쉽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쉽
빌리 그래함
그랜트 왜커/서동준/선한청지기/방영민 편집위원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쉽   서론 빌리 그래함에 대한 이름만 알고 있었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와 사역과 평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에도 1952년, 1973년, 1984년 세 번 방문하여 한국 기독교와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고, 특별히 1973년에 여의도 집회에서는 5일 동안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하고 7만 2000여명이 결신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가 설교해서 삼천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는 베드로 같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함은 막...
설교는 도박이 아니다 설교는 도박이 아니다
이규현 목사의 설교론
이규현/두란노/방영민 편집위원


설교는 도박이 아니다   이규현 목사의 목회론에 이어 설교론을 펼쳤다. 한 설교자가 들려주는 설교에 대한 개념들과 정의들은 말씀을 전하며 살아가는 설교자들에게 뼈와 살이 된다. 이 책은 그동안 그가 설교자와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전하였는지 그의 목회와 삶을 녹여서 설교에 대해 전해주고 있다. 목회론을 보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평범한 대형교회 목사라기보다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 자신의 사상을 전하고 사람을 키울 수 있는 거목이 된 것 같다.   이규현 목사는 현 시대를 정확히 파...
우리 삶의 열 일곱가지 이야기 우리 삶의 열 일곱가지 이야기
그 사람 모세
김영봉/복있는 사람/서상진 편집위원


한 사람의 일대기를 생각해보면, 일대기 속에서 나의 삶과 비슷하고, 내가 경험했던 상황과 유사한 경험을 했던 일들을 보게 된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일상생활이 제한되고, 제한된 일상 속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부분들을 이제는 하지 못하는 어려운 경험을 맞이하고 있다.   광야 시대에도 펜데믹은 존재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전염병의 출발은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광야로 사흘길을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에서 전염병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왜 모세와 아론은 광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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