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네 편의 초상화와 한 분 예수
네 편의 초상화와 한 분 예수
저자는 처칠의 초상화 이야기로 본서를 시작한다. 처칠은 저자가 영국인이기 때문이고, 초상화는 처칠의 초상화를 여러 사람과 다양한 각도에서 그렸기 때문이다. 즉, 처칠이라는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다양한 처칠의 초상화가 존재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한 분이지만, 그의 복음서는 네 개다. 고대 그리스도교 교부들이 복음서를 네 개로 확증하면서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십대에 어머니의 권유로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성경을 집어 던지고 마니교로 빠졌다는 전설이 있다. 이처럼 오늘날과 다르게 고대 그리스도교에서는 네 개의 복음서가 많은 혼란을 야기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사 복음서 외에도 다양한 복음서라는 이름을 가진 영지주의 문서들과 예수님의 어록처럼 구성된 복음서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복음서를 하나가 아닌 네 개를 정경으로 확정했으며, 그 이외의 다수 복음서의 이름을 가진 문서들을 제외시켰다. 사실 복음서는 신학적으로 많은 숙제를 가지고 있는 성경의 장르이다.
준비 작업
본서의 원제는 “Four Gospels, One Jesus?: A Symbolic Reading”이다. 복음서에 관한 연구물 모두가 그렇듯이 저자 또한 한 분 예수에 관한 복음서가 네 개라는 사실과 각각의 차이들에 대해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네 복음서들이 각기 가지는 특징들은 이미 고대 그리스도교 때부터 각각의 복음서들에 상징적 그림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징적 그림들을 저자는 각각의 복음서들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한 분 예수님에 대한 각각 다른 네 개의 초상화로 묘사한다.
1장은 각각의 복음서를 다루기 위해 복음서의 본질에 관해 살핀다. 즉, 복음서의 문학적 장르, 복음서가 기록된 배경과 과정에 대한 자료, 복음서가 담고 있는 자료의 종류인 양식, 그리고 각각의 복음서가 차이를 보이는 이유들의 근거인 편집과 구성, 복음서의 내러티브와 독자, 성서비평, 그리고 네 복음서가 가지는 각각의 특징인 상징부여, 그리고 그 상징들이 시각적 도구였던 근거와 설명과 교회사 안에서 복음서에 대한 해석의 변천들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한다.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하여 저자는 복음서는 고대 전기 문학적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러한 양식을 취한 목적과 그 양식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문학 비평적 방식들로 복음서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언급한다.
네 개의 초상
저자는 2장부터 5장까지 마가, 마태, 누가, 요한의 순서로 각각의 복음서들을 살핀다. 마가의 초상은 사자이다. 사자는 매우 신속하고, 은밀하게 숨었다가 갑자기 쏜살같이 튀어나와 먹이를 사냥한다. 이처럼 마가복음은 예수라는 이름만으로 시작한다. 이 책에는 탄생 이야기도 없고, 베들레헴은 언급조차 없으며, 족보나 다윗의 혈통도 없다. 즉, 마가는 준비하느라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다. 또한 마가의 예수는 시작부터 초자연적 능력을 행하시는 분으로 나타나 시종 일관 강력한 능력을 가진 예수님으로 묘사된다. 마태의 예수는 인간의 초상을 가진 예수로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으로 나시며, 새로운 율법의 교사로서 유대교와 갈등을 일으키신다.
누가의 예수 초상은 소이다. 그는 묵묵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과 사역을 순종한다. 요한의 초상은 독수리이다. 독수리는 하늘 위에서 땅 아래의 모든 것을 조망한다. 그리고 하늘을 유유히 비행하다가 신속하게 급강하하여 먹잇감을 잡는다. 이처럼 요한의 예수는 매우 심오하면서도 매우 현실적인 예수 그리스도로 묘사된다.
저자는 복음서가 고대 전기 문학임을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는 “우리는 고대인들이 진리와 신화, 거짓과 허구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고려하지 않은 채 현대적인 개념들을 고대 문서에 들이대서는 안 된다. 현대적인 사고방식으로 볼 때 ‘신화’는 진실이 아닌 ‘옛날 이야기’를 뜻한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신화는 심오한 진리, 다시 말해 단순한 사실보다 훨씬 더 참된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였다. 진리의 반대말은 허구가 아니라 거짓과 기만이다. … 기억해야 할 점은 고대인들이 특정 진술의 논리적 중요성보다 그 진술이 담고 있는 도덕적 가치와 철학적 유용성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사실보다 진리에 관심했다”(292-293페이지)라고 주장하면서, 고대의 전기와 현대의 전기기술 방식과 부분적으로 전기의 그 목적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도교 교부들이 복음서를 네 개로 정한 것은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만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들을 통하여 진리에 대한 다양성을 열어 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복음서는 사건과 사실들의 일치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 예수의 변천
복음서는 네 개이지만, 그 복음서의 핵심인 예수는 한 분이시다. 즉, 네 개의 복음서를 통한 다양성 가운데, 한 분 예수라는 연속성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초기 교회의 모자이크화를 보면 수염을 말끔하게 밀어내고 곱슬머리를 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을 돌보는 젊은 목자로 나온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의 치하에서는 처음으로 로마의 통치자가 되었다. 더 나아가 비잔틴 시대에서는 ‘판토크라토르(우주의 지배자)’가 되었다. 예술 분야에서도 로마시대에는 황제의 자색 토가를 입었고, 중세 프레스코화와 성상에서는 하얀 예복을 입고 사람들을 준엄하게 바라보고 있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예수는 ‘보편 인간’이 되었고, 이성의 시대인 17-8세기에는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합리적 예수 이해가 등장했다. 데이비드 흄은 기적 이야기를 일축했고, 라마이루스나 레싱은 인간 선생인 예수를 찾았다. 19세기에서는 낭만주의적 관념론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예수의 일대기를 썼으며, 자유주의 세대에 와서는 해방자 예수라는 길을 열었다(302-304페이지).
한 분 예수
이렇듯 네 편의 복음서가 그린 예수는 신학계, 문화계, 신앙과 예술의 영역에서 수많은 ‘예수들’로 뻗어 나갔다. 이 모든 예수의 초상은 동등하게 타당한가? 이렇게 시대마다 예수는 세대마다 다시 태어나도 되는 것일까? 저자는 복음서가 한 권이 아니라 네 권이며, 마흔 네 권이 아니라 네 권이라고 말한다. 즉, 네 권이라는 점은 다양성을 의미하고, 마흔 네 권이 아니라는 말은 한계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 권의 복음서가 다른 세 권의 복음서 기준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즉, 각각의 복음서가 동등한 권위를 가짐으로 네 권의 복음서 안에서 다양성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네 권의 복음서 안이라는 분명한 경계와 한계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로버트 모건은 네 편의 복음서가 “자극제이자 제어장치”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본서는 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주는 책이다. 앞부분 1장이 어려우면 2장으로 바로 들어가라. 각각의 초상화를 보면서 큰 그림과 함께 아주 좋은 해석의 지도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1장의 내용을 이해해야 본서의 참 맛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첫 번째 장과 마지막 장을 그냥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본서는 복음서를 설교하는 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