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회복을 향하여
회복을 향하여
현재 한국교회는 다양한 비판 가운데 놓여 있다. 물론 필자인 나도 현재 한국교회의 행태에 대해 개혁을 외치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필자는 현재 목회에 관계된 서적들에 대해 불신이 높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설교집과 목회에 관계된 책들을 회피하고 거부한다(이것이 또 하나의 교만이라는 충고에는 십분 공감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현재 필자가 성경을 중심으로 알기에는 교회는 성장과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 아니다. 복음의 전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 땅 가운데 행하여지는 것, 즉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확장되어지는 것이다. 그 속에 있을 때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가 된다. 지금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려도 이미 맛 잃은 소금이 되어 버렸다). 본서의 저자도 한국교회에 대한 깊은 안타까움과 고민을 본서에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을 ‘삼위일체적인 선교적 교회’라고 제시한다.
복음주의 한계를 넘어서라
저자는 2장에서 오늘날 담임 목회자와 교회에 대하여 ‘진보’와 ‘보수’, ‘복음주의’, ‘오순절 주의’라는 관점으로 분류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회는 진보와 보수가 함께 공존해야하며, 복음주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라고 한다. 그 한계는 ‘제자도의 부재’, ‘사회윤리의 부재’, ‘지성의 부재’, ‘관용의 부재’를 들고 있다. 사실 1990년대부터 한국교회는 제자훈련이 붐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금도 그 잔여 영향력이 남아 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본다면, 과거 한국교회의 제자훈련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담임목회자의 제자, 개 교회의 제자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결국 모든 가짜가 그러하듯 지금은 그 유행이 마침표에 다다르고 있다. 본서의 저자가 지적하는 나머지의 사회윤리, 지성, 관용의 부재는 현재 임계치를 넘어 사회 전반에서 그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본서의 저자는 한계를 극복하라고 언급하였지만, 필자는 교회의 정체성과 복음의 정체성의 기초부터 다시 세우기 위해 지금의 모든 것을 허물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리모델링의 수준이 아니다. 구조와 골격까지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저자는 독특하게 오순절 교회를 포함시킨다(이 부분은 정말 할 말이 많고, 필자가 원고를 쓰고 있으며, 단순한 문제가 아니지만, 지면 관계상 자세한 언급은 생략한다).
더불어숲동산교회의 신학적 비전
이 부분은 사실 본서의 메인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생각되지만, 두 가지 생각이 겹쳤다. 먼저는 ‘참 대단하다.’라는 생각이다. 성경적 교회와 균형 잡힌 교회를 꿈꾸는 것을 넘어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부분적으로 실행해 옮기는 것은 결코 단순하거나 만만치 않는 어려움과 문제들을 넘어서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필자는 사실 이 대목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 10년 전 개척을 하였지만, 본서의 교회에 비하면 이룬 것이 하나도 없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평을 하고자 한다). 다른 한 가지 생각은 ‘자기 자랑’처럼 느껴졌다. 이것 또한 필자의 현 처지와 비교되어 일정 부분 질투심이 기인되어 있다고 말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필자만 그렇게 느낀다고 단정하기는 좀 그렇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저자는 정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의 목회경험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개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감사함을 느낄 수도 있고, 필자와 같이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숲동산교회의 신학비전은 매우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은 ‘하나님 나라’, ‘급진적 제자 공동체’, ‘공교회성’이다. 사실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 사라진 개념들이다. 그리고 이 개념을 자신의 교회에 포함시키려면, 자기교회 중심적 부흥이라는 욕심을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즉, 본서를 통해서는 개 교회 중심성(교회의 공동체성, 보편교회)이라는 부분에서는 아직 미흡해 보인다.
공공성과 공동체성
본서의 3부와 4부는 교회의 공공성과 공동체성 회복을 언급한다. 교회의 공공성에서 저자는 ‘마을 만들기’를 소개한다. 즉,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종교적 역할만이 아니라 그 마을의 일원이 되어 그 마을에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교회의 역할을 소개한다. 여기서 저자는 본서의 제목인 ‘페어’를 자세히 설명한다(궁금하면 읽어보시라).
그렇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자신의 지역사회에 대하여 ‘구원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즉, 자신들은 거룩한 성도로서 구별된 존재이며, 저들은 지옥에 떨어져가는 존재들로서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교회는 그 시대와 그 지역에 종교적 책임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 함께 주어져 있다. 하늘 보좌에 계신 독생자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친구가 되신 것처럼, 교회는 세상으로 성육신하여 예수님이 들었던 비판, 즉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이것이 사랑이다). 다시 말해 교회는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 일원으로서 그들의 친구이며, 친구가 되어야 하는데, 저자의 교회는 이러한 역할을 위해 노력과 일정부분의 결과물을 내어 놓고 있으며, 많은 교회들에게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 단계 더 극복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개 교회 하나가 그 역할을 독점하거나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즉, 지역의 교회가 연합하는 부분으로 공교회성 회복이 반드시 시도되고 정착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인식의 수준에서부터 넘지 못할 벽으로 남아 있는 숙제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저자는 현재 제도적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고 거기에 대한 대안적 견해와 일부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본서는 매우 유익하다. 그럼에도 그 대안이 필자가 보기에 유기적 방법이 아니라 제도적, 조직적 방법에 의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서 개인적으로는 교회가 더욱 유기적이기 위해서는 훨씬 더 교육과 훈련에 집중된 목회 방식이 되어야 하고, 교회가 프로젝트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성도들에게 자율권을 보장하면서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본다(그래서 목회자는 바른 진리에 근거한 교육과 훈련<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고, 사역은 성도들이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을 말한다). 즉, 교회는 마중물만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사람들은 점점 교회를 외면해 가는 상황과 교회가 사회적 문제의 이슈 중심에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안일하게 그래도 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그동안 해오던 관행을 바꾸지 않는 한국 대형교회의 모습과 관행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축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여전히 자신이 대형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프라이드를 가진 분들이 존재하지만, 또한 다수의 성도들이 현재의 교회 모습에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는 줄로 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교회에 대해 고민하고 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을 찾고 있다면, 한국교회 현재의 상황에서 본서는 매우 유익한 내용과 비전, 그리고 대안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곧 본서를 가지고 중직자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는 교회의 성장을 고민하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고민과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