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당신은 예수를 누구이라고 고백합니까?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1934-)은 대표적인 급진적 예수 연구자이다. 천주교 사제에서 떠나 자유로운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다. 크로산은 로버트 펑크와 함께 1985년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를 구성해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새로운 기원을 창출했다. 즉 미국에서 새로운 예수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는 독일 계열(종교사학파), 영국의 새관점학파, 미국의 예수 세미나로 나뉘어서 연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CLC에서 번역한(손혜숙) <예수논쟁>은 예수 세미나에서 추구하는 예수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예수 논쟁>에 비견되는 저술은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 (CLC, 2003년)을 참고할 수 있겠다. <예수논쟁>은 1999년에 발표된 저술이고,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는 Luke Timothy Johnson(1943-)이 1997년에 출판한 작품이다. <예수논쟁>에는 존슨의 글, “예수의 인간성”도 있어, 크로산과 논쟁을 이루는 구도이다. 역자는 크로산이 “매우 의도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모독한다”고 평가했다.
17세기 계몽철학 시대에 ‘기적’을 부인하면서, “예수를 믿는 신앙”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 체계로 전환을 시도했다. 자유주의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사랑”으로 규정하면서 대전환을 이루었다. 현재 본질은 순수 현상(entelecheia)로 가는 과정에 있는 현실태이다. 계몽철학과 자유주의가 확립한 기독교는 합리주의 기독교(rationalism)이다. 메이천 박사는 자유주의를 기독교로 분류하지 않고 합리주의, 즉 철학으로 분류시켰다(참고 기독교와 자유주의, 1927년). <예수논쟁>을 추천한 안승병 박사는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는 저술이라는 아쉬움의 평을 했는데, 이 저술은 진보나 보수 모두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저술이다. 매우 전문적인 신학 저술을 번역해서 소개하는 출판사에 고마움을 표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연구자들의 신학 연구 산물도 풍성하게 출판되기를 기대한다.
필자는 보수적인 자세로 신학을 연마하며, 예수를 주와 구주로 믿고 고백한다. 보수적인 연구는 16세기 칼빈과 루터 신학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보수적인 연구자의 자세에서 개략적으로 <예수논쟁>에 대한 내용을 브리핑하려고 한다.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의 저술도 독서한 뒤에 함께 비교한다면 좋은 학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합리주의로 기독교를 이해하거나 구성하려는 것은 부당하다. <예수 논쟁>의 세 저자는 모두 합리적인 방법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확립하려고 한다. 합리로 재구성된 기독교는 계몽철학에서 시작되고 300여년 동안 변화 없이 유지되는 방법이다. 합리주의에서는 합리적 지식에 근거하여 합리적 지성인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둘째, 정경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외경, 도마복음서등은 기독교 근간에 핵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셋째, 역사와 신앙의 차이가 없다. 크로산은 이러한 방법으로 신학을 진행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크로산은 부활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자유주의에서는 예수 생애를 강조하며, 예수 초상을 그리려 했다. 그런데 예수 세미나는 부활을 강조하면서 예수 정신(혁명 정신)을 반복하려고 한다. 생애를 연구하면 십자가에서 종료하고, 부활에서 연구하면 십자가와 미래가 함께 열린다. 전자는 과거의 의미를 밝히려고 하는데, 후자는 현재에 근거하여 과거와 미래를 규정한다.
둘째, 루크 티모디 존슨은 “예수의 인간성”을 제시했는데, “예수 인간성 반복”을 추구한다. 존슨이 크로산의 “부활” 주장과 다른 “인간성”을 주장하지만, 큰 틀(합리적 구조)에서는 차이가 없다. 존슨은 현대 연구자들의 다양한 예수 모습을 소개했다(118쪽).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는지 묻는 상황이 재현되는 것 같다. 존슨은 예수 인간성의 반복하는 형태를 성자(도릿 데이, 테레사 수녀)들을 제시했다(149쪽). 필자는 예수의 인간성은 무죄한 인간성이고, 반복이 아닌 믿음의 대상으로 본다.
셋째, 베르너 H. 켈버(1935-)는 역사적 예수 탐구를 위해서 과거에 이단으로 결정한(영지주의 등)을 해체하고 복원해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포괄주의의 모습이다. 켈버는 정통주의가 이단을 부정함으로 파편에 이른 체계이기 때문에 모두를 통합해야 한다는 견해이지만, 결국은 정통신학을 부정하는 것이다. 비록 켈버가 금욕주의, 여성학대, 이원론 등을 거부하지만, 거부하기 때문에 정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켈버의 전개를 보면 영지주의를 복원하는 것과 페미니즘 형성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싸르코포빅, 싸르코필빅이 뒤편에 있어서 어떤 어휘인지 당황해서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역자가 서문에서 정리해주고 있었다(sarcophobic-육체회피<금욕주의>, sarcophilic-육체친화<지향점>).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는 것이 빠른 이해를 위해서 좋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도 필자는 속독(速讀), 전체 개괄 독서를 제언한다.
“예수 탐구”는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독서하고 연구해야 한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도, 1세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질문에 대해서 여전히 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답은 매우 신속하고 정확하게(prompte et sincere)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나는 예수를 무엇이라고 고백할 것인가?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존 칼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