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종교개혁적 예전학
책을 받아 보고서 영어 참고서 같아서 한참을 되작거렸다. ‘학습 현황 점검표’도 있고, 단원이 마칠 때마다 ‘단원학습 점검표’, ‘스터디 플랜과 인도자 가이드’ 등이 영락없는 학교 참고서였다. 책을 중간 쯤 볼 때 누군가를 통해 책을 이렇게 편집하는 것이 출판사의 컨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용을 보다 더 잘 파악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고 어색한 책 틀에 적응하다보니 예배에 대한 기본 개념을 이해하는데 이런 형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제목이 ‘특강 예배모범(신개념 기독교 고전학습서)’이다. 말 그대로 ‘고전학습서’를 만들려고 애쓴 책이다. ‘예배 모범’이란 말에 대해서는 책 끝부분에서 저자가 중요한 지적을 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하던 대로, 듣던 대로, 보던 대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범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모범을 찾거나 따를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행동이 당연시되면서 본질과 참 많이도 멀어지고 말았습니다”(329쪽). 예배모범이 예배의 표준이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53쪽) 적어도 예배형식은 어느 날 급조된 것이 아니라 신학과 교회 현실이 농밀해 있는 결정체이다. 예배가 어떤 형태를 갖게 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우리는 오랜 시간 익숙한 예배형식에 대해 정색하며 질문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하는 건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그것은 평신도들뿐 아니라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의 뿌리를 찾는 이유가 될 것이다.
교단의 특징이 점점 사라지는 지금,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을 중심으로 장로교 예배 형태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개혁파 교회의 전통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싣고 오늘의 한국교회예배를 되짚는 해설 부분은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조목조목 한국장로교 교단의 헌법을 비교해서 볼 수 있게 한 것은 책의 큰 장점이다. 목사가 된지 수십 년이 지나도 헌법책에 수록된 예배모범을 읽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책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순서가 왜 필요한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소홀이 하고 있는 예배의 순서는 무엇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알다시피 한국교회의 예배형태는 유럽 개혁파교회로부터 전달받기보다는 1800년대 미국 교회부흥시대의 예배형태가 한국교회에 주요하게 이식되었다. 개신교 예배는 가톨릭과 달리 다양성과 자유가 전제되지만 장로교의 근간이 되었던 개혁파 교회의 예전을 온전히 전달받지 못한 것은 한국장로교회의 아쉬운 부분이다. 말씀과 성찬이 중심되었던 3-4세기 교회의 예배 형태가 중세기 동안 의식(儀式)중심, 사제 중심으로 바뀌면서 회중들은 예배의 구경꾼으로 전락되었다. 더욱이 라틴어로 드리는 예배를 대다수 회중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찬양도 정해진 몇 사람의 전유물이었다. 화채설의 영향으로 회중들에게는 성찬 때 잔을 주지 않았는데 포도주를 흘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개혁자들의 예배는 이런 중세예배를 원래의 성경적 의미대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루터는 자국어 예배를 주장했고, 칼뱅은 성가대를 폐지하고 회중찬송을 도입하므로 찬양을 온 회중의 찬양이 되게 하였다. 생각해 보면 회중의 찬양보다 찬양대와 오케스트라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는 오늘 교회의 현실과는 생경한 모습이다. 예배가 간소화되고, 화체설을 부정함으로 회중들에게도 성찬잔을 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예배모범이 작성되고 1645년 공포되어 장로교 예배의 근간이 되었다. 개혁파 교회의 예배 모범의 핵심은 하나님과 회중의 온전한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해 내는 일이었다. 예배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예배의 공간에서 인간의 고안물을 걷어내었고 강단의 장식마저도 회중들의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도록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고도 소박하게 만들었다(365쪽). 설교자의 얼굴이 잘 보이는데도 강단에 대형화면을 설치하여 설교자의 얼굴을 비추는 한국교회 예배풍경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예배와 예배순서를 맡은 이들도 한 사람의 회중에 불과하다는 개혁자들의 생각을 잘 갈무리해야 한다. 칼뱅은 “목사가 회중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의자를 회중이 앉는 의자와 마찬가지로 크기나 모양이 평범한 의자를 사용하였고, 이 의자를 설교단 아래, 곧 성도들 사이에 성도들과 같은 높이에 놓아두었는데, 예배 인도자로서의 목사가 회중과 동일하다는 표현”(104쪽)이었다.
설교에는 두 가지가 있다. ‘보이지 않는 설교’ 혹은 ‘들리는 설교’인 강단에서 전하는 ‘설교’와 ‘보이는 설교’로서 ‘성찬’이다(242쪽). 보이는 설교는 시각적 전달이 중요하므로 성찬상의 성찬보를 제거하고 성찬기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목회자들이 기억해야 한다. 성찬보는 빵과 잔에 먼지가 앉지 않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이미 성찬기 뚜껑으로 덮어둔 상태이니 이중으로 덮어 ‘보이는 설교’를 방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랫 강대상’이 성찬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윗 강대상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는 아랫 강대상이 아니라 성찬을 진열하기 위한 성찬상이다. 개혁파 교회는 설교단과 성찬상 그리고 성찬상 위에 세례를 위한 세례반이 항상 진열되어 있다(366쪽). 한국교회의 예배당 구조도 유럽의 개혁파 교회보다 미국교회의 형태를 따른 것이다. 찬양대 석이 강단 옆에 위치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책에서 예배당 공간에 대해 보다 세밀한 언급이 있었다면 한국교회 예배 공간을 이해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공간은 생각이 담겨 있다.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예배 공간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예배당 안에 설치되어 있던 성화와 성직자의 예복, 촛대, 향 등을 제거한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장로교 합동과 고신 교단은 강단의 십자가까지 부착하거나 설치할 수 없도록 결정하였다(367쪽). 저자도 이 결정에 동의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 성찬상에 성찬보를 제거하여 회중들이 성찬기를 보며 그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면(258쪽) 회중들이 강단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 또한 가능한 일이 아닌가. 강단에 십자가 부착을 금지시킨 것은 상징의 역기능, 즉 ‘상징의 타락’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상징은 본질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기능을 상실하여 상징이 우상화될 수 있다는 염려 말이다. 성찬이 ‘들리지 않는 설교’(242쪽)이듯 십자가도 말없이 전달되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회중들에게 전달하는 풍성한 순기능이 있는데도 역기능을 염려하여 미연에 제거하는 것은 오감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메마르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다.
보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순서는 ‘축도’이다. 저자는 ‘축도’를 “눈을 감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떠야 하는 시간”(281쪽)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축도는 ‘축복기도’가 아니라 ‘강복선언(Benediction)’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이 맞다. 개혁파 교회는 ‘축도’가 아니라 ‘강복선언’으로 민수기 6장 24-26절과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등을 대표적 선언의 말씀으로 삼았다. 그래서 눈을 뜨고 목사가 손을 올려 강복선언하는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 하지만 한국장로교교단은 대체적으로 강복선언보다 축도에 가깝다. 그래서 교단이 정해 놓은 정형화된 축도문이 있다. 축도를 강복선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교단이 정해놓은 축도문을 벗어나 성경구절을 낭독하는 것도, 회중이 눈을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책은 성찬의 공동체성과 종말적 측면(241쪽), 음식으로서의 떡과 포도주(250쪽), 유아세례(219쪽), 영어예배(183쪽)에 관한 문제와 장로가 예배 시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103쪽), 교육전도사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176쪽) 등 교회가 전통 속에서 함께 고민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로 가득하다. 예전(禮典)에 취약한 한국장로교회가 장로교의 전통 속에서 현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잘 정리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