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성실한 질문이 성실한 대답을 낳았다
성실한 질문이 성실한 대답을 낳았다
진지하면서 흥미로워 한 숨에 읽히는 기독교 변증서를 만났다. 기독교 세계관 혹은 인문학을 녹여낸 편지라는 점도 탁월한 발상이었다. 자녀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형식을 취하면서 가벼운 듯 무거운 심도 있는 콘텐츠를 탄탄한 구성력으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도 신선하다.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들에게는 익숙한 주제들이지만 막상 고등학생 혹은 자녀에게 전달하려면 진땀을 흘리게 한다. 여간 해서 시도조차 하기 꺼린다. 자칫 하면 전달에 실패하거나 관계가 더 멀어져 세대 간의 온도 차를 확인하는 일만 되는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시도는 기독교 입문서로서의 적잖은 통찰과 방향을 제시해 준다. 기독교 세계관적 관점으로 매주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에서 소소한 세 가지를 새삼 발견하게 된다.
문제의 진지함이 답변의 성실함을 낳았다. 문제를 잘 알면 답이 보인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아야 거기에 대한 답도 알아 낼 수 있는 법이다. 마치 환자의 병이 어디서 언제 어떻게 퍼져 있는지를 알면 약물치료를 할 것인지 수술을 해야 하는지 견적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의 깊이는 답변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기적의 문제를 질문할 때 “데카르트가 주장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합리적인 것만을 원하는 사회..(중략) 이런 시대에 성경에 적혀있는 기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p.40)라든지, 인간에 대하여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주장을 들어 의문을 제기한다든지(p.59) 하는 것은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가질 때 성실하게 답변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 대부분의 질문들이 인문학적, 신학적 연구와 고민을 하게 만드는 회의적 통찰 작업을 담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편지 글로도 얼마든지 기독교를 변증할 수 있다. 이 책은 내용상으로는 논설문이지만 구조상으로는 서간문의 형식을 뛰고 있다. 편지의 형식을 빌어서도 짜임새 있게 변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글의 구조를 보면 먼저 문안 인사와 근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일상에서 느끼는 윤리, 영성, 경제, 세계관에 관련된 의문점들 언급하며, 궁금했던 부분의 원인과 의문이 나는 일에 설득력 있게 접근하여 질문하고 있다. 답신 글도 역시 마찬가지다. 인사에 대한 리액션을 취하고, 질문에 대한 이해를 다시 확인 시켜주며, 이어서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근거를 들어 설명한다. 조직신학적인 내용들을 생활언어로 풀어내려고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예를 들면 구어체와 단문을 사용한 것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배려가 중간중간 배어 있다는 사실이다.
역시 제일 좋은 스승은 가족이었다. 아빠는 기대감과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아들의 편지를 기다리며 일상을 살아낸다. 오히려 이런 논리적 회의와 진지한 질문들을 던지는 아들을 대견스러워 한다. 아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하여, 또는 목회자로서 기독교 신앙을 전수하기 위하여 열 가지 범주들을 충실하게 설명해 주었다. 찬찬히 조목조목 설명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빠의 자상함이다. 대다수의 답변은 아빠가 전하고 있지만, 다른 가족들의 역할도 가끔 등장한다. 엄마와의 대화 속에서 혹은 여동생과의 추억 어린 사건들 속에서도 질문에 대한 답의 힌트들을 찾아가기도 한다. 관심사와 취향을 비교적 잘 아는 가족들이 사실상 나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스승이다. 아니 가족이 그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또 하나의 질문을 내심 던지게 만든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는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진리에 관한 성실한 고민과 생각들을 던져줄 뿐만 아니라 명쾌한 방향과 대안들을 찾아가도록 안내하고 있다. 궁금한 주제들을 묻고 답하는 형식의 입문서는 흔하지만, 일문일답식의 여느 비슷한 장르의 책과는 접근 방식을 달리 하고 있다. 눈에 뛰는 것은 질문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었다. 단지 분량이 많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 질문자가 갖는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와 건전한 비판에 기초한 회의적 사고 또한 읽는 내내 함께 문제에 빠져들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