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칼뱅은 제네바에서 이방인 프랑스 사람 목사이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이방인 프랑스 사람 목사이다
‘칼뱅’, ‘칼빈’은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한국에 “칼빈대학교”가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16세기 제네바에서부터 유럽에서 21세기 한국까지 칼뱅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은 연구자들이 셀 수 없이 많다. 2009년 칼뱅 탄생 5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했지만, 혐오에 대한 영향력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연구 논문이 발표되어도 그렇다. 정요한이 소개한 나치 선동가 괴벨스의 주장과 같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반박은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선동에 반박할 때에 이미 선동되어 있는 상태로 주장했다. 정요한은 그러한 선동에 휩쓸리지 않은 상태에서 칼뱅을 선동하는 것에 대해서 잔잔하게 부당함을 제시했다.
<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는 학술 논문이 아니고, 매우 짧은 이야기체(내러티브) 글이다. 필자는 왜 칼뱅을 학살자로 규정하려는 것인지, 혐오감을 갖고 있는지 아직까지 이해하지는 못한다. 칼빈 당시에 볼섹, 카스텔리옹, 그리고 20세기에 대표적인 칼뱅 혐오자인 츠바이크 등이 있다. 칼뱅에 대한 연구는 칼빈주의, 루터, 로마 카톨릭, 재세례파 모든 종파에서 연구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재세례파에서 칼뱅은 어떻게 표현할까?
<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는 상당히 얇은 소책자인데, 3부 잘못된 전제들, 학살과 학대, 그리고 꽁시스투아, 세르베투스로 구성했다. 그리고 결론과 부록으로 구성했다. 그래서 매우 간명하게 칼뱅이 학살자가 아님을 변호했다. 강의체로 진행하기 때문에 저자가 또박또박 설득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저자는 칼뱅 당시의 제네바와 유럽 상황을 간명하게 소개하고 있다. 20세기 관점으로 16세기를 평가하는 것이 부당하고, 21세기 한국의 관점으로 16세기 제네바를 평가하는 것은 더더욱 부당하다. 저자는 16세기 제네바를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칼뱅이 설립한 꽁시스투아(Consistorie)를 소개한다. 최근 출판된 임종구의 박사 논문인 <칼빈과 제네바목사회>(부흥과개혁사)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꽁시스투아는 회의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충분히 칼뱅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칼뱅을 살인자로 몰아넣은 근거로 세르베투스의 화형인데, 저자는 세르베투스의 상황과 사상에 대해서 제시하며 전개했다. 저자는 세르베투스에 대한 칼뱅 서신 자료들에 대한 부당성을 강력하게 밝혔다. 칼뱅을 살인자로 규정하며 주장한 자료들이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정요한의 <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는 상당히 간결한 저술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16세기 제네바를 그릴 수 있도록 한 뒤에,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사료를 근거하지 않은 주장에 대해서 명료하게 반박했다. 제네바를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이 책을 읽고 간다면 베드로 예배당에서 칼뱅의 향취를 더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칼뱅 이전의 제네바와 이후의 제네바를 상상해 보자. <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은 저자가 당시 상황을 그리면서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그림을 따라서 그려본다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는 세움북스가 "팩트체크시리즈 1"로 진행한 것이다. 세움북스에서 기독교 교회사에서 여러 상황에 대한 흥미롭고 객관적인 팩트체크가 진행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