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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성경에 천착한 탁월한 종말론 주해

크리스찬북뉴스 | 2017.10.14 09:33
성경에 천착한 탁월한 종말론 주해 조지 래드의 종말론 강의/조지 래드/이승구/이레서원/정현욱 편집위원

종말론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교회는 처음부터 종말론적이었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 강약을 조절하며 종말론의 관심은 지속되었다. 특별히 세기말이나 어지러운 시국에서는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특이하게도 종말은 곧 이단이라는 명제가 생길 만큼 황당하게 이끌렸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두 가지 성향을 띠는데 하나는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에서 생기고, 다른 하나는 종말에 대한 왜곡에서 발생한다. 인터넷에서 종말이란 키워드로 검색하면 수도 없이 많은 자료들이 떠오른다. 필자가 직접 종말이란 단어로 구글링을 시도하니 스티븐 호킹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즉 종말은 신학적인 주제로만 남겨져 있지 않고 과학과 인문학, 역사, 영화 등에서도 깊이 연관을 맺는 주제이다. 시대적 조류를 타고 이단들이 종말론을 가지고 나와 교회를 흔들어 놓은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정작 교회는 왜 종말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 실제로 교회 안에서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극단적인 성향의 목회자가 아닌 이상 설교나 성경 공부에서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종말은 의외로 민감한 사항이고, 어려운 주제이다. 그렇다고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괜찮을까? 이단에 휩쓸리는 성도들이 종말을 물어올 때 목사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위해 지옥을 준비했다’(어거스틴)고 우기는 것으로 회피하면 될까? 학자적 수준까지 답을 줄 필요는 없겠지만 종말이 무엇이고, 종말론적 삶이 무엇인지는 말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종말에 관한 기본적인 책 한 권쯤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그분들을 위한 한 권을 책을 추천한다. 바로 조지 래드의 <종말론 강의>.

 

이 책은 본시 2000년에 이레서원에서 <개혁주의 종말론 강의(The Last Things: An Eschatology for Laymen)>란 이름으로 출간된 것을 개정하여 다시 출간한 것이다. 개정에는 이승구 교수의 종말 신학의 프롤레고메나의 논문을 실어 종말론에 대한 이해를 더하도록 했다. 이 논문은 원래 <성경과 신학>이란 논문집에 실린 것이다. 본서와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종말론을 이해하는 작은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승구 교수는 역자 후기에서 이 책에 종말론이 붙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마지막에 될 일들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고 말한다. 조지 래드는 찰스 어드만, D. A. 카슨, 웨인 그루뎀 등과 함께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주장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책을 읽어 나갈 필요가 있다. 전천년주의 입장은 환란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일제강점기를 지나온 한국교회는 대부분이 전천년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성향은 무천년주의를 더욱 지향하고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관점은 시대의 흐름과 밀착되어 있다. 필자는 본서를 먼저 저자의 주장을 개론적으로 요약하고 비평을 시도할 것이다.

 

-종말에 대한 네 가지 관점과 조지 래드의 관점

 

종말에 대한 중요한 네 가지 관점은 역사적 전천년주의(Historic Premillennialism),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이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네 가지 관점을 가진 이들을 분류해보자. 먼저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은 전통적 기독교 사상이며 20세기에 큰 힘을 발휘한 사관이다. 이들은 환난 후 역사적으로 천년왕국이 도래한다고 믿는다. 조지 래드도 이곳에 속한다.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는 환난 전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본다. 세대주의는 따로 배워야 할 이단적 성향이 높은 무리들이 만든 문자적 성경에 해석에 따른 관점이다. 대체로 학자들이 아닌 일반 교인들이 좋아하며, 부흥과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는 말 그대로 천년왕국이 역사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교부인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인 칼빈과 청교도의 다수, 게할더스 보스와 루이스 벌코프, 그리고 그의 제자인 앤토니 후크마가 주장한다. 이들은 역사적 천년왕국은 존재하지 않고 종말과 함께 부활하여 의인은 천국으로 악인은 심판을 받는다.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는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에서 힌트를 얻어 생긴 주장이다. 중세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했고, 18세기 역사의 진보와 완성을 주장하는 식민적 전제주의 사상과 밀착되어 있다. 이들은 역사의 종말이 있기 전 교회가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한 다음 천년왕국이 된다. 천년왕국이 끝난 후 종말이 온다고 믿는다. 아쉽게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후천년주의는 힘을 잃었다.

 

조지 래드(George E. Ladd)의 번역서를 소개하면 이렇다. 가장 최근인 2016년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설명한 <조지 래드 하나님의 나라>CH북스에서 출간되었다. 원제는 'The Presence of the Future: Jesus and the Kingdom'이다. 제목에 역사적 전천년주의적 관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2001년 서로사랑에서 번역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있는데 원제는 ‘Scriptural Studies in the Kingdom of God’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래드의 관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재림과 휴거>란 제목으로 영문에서 1993년에 출간되었지만 오래전에 절판된 책이라 구할 수 없다. 이 책의 원제는 <The Blessed Hope: A Biblical Study of the Second Advent and the Rapture>으로 1990Eerdmans에서 출판된 책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환난 전휴거를 비판하며, ‘환난 후휴거가 더 성경적이라고 반박한다.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이다. 이상으로 종말에 관한 네 가지 관점과 조지 래드가 주장하는 역사적 전 천년설에 관한 책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성경 해석의 기초

 

먼저 주의하여 볼 것은 조지 래드의 성경해석 관점이다. 조지 래드는 처음 세대주의자’(13)였다. 세대주의자는 역사전 전천년주의와 유대인의 회복을 뺀 나머지는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성경 해석의 성향을 알 수 있다. 그는 1장과 2장에서 성경의 해석의 틀과 종말의 이스라엘을 성경 속에서 정의한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와 인자는 같지 않다. 구약의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미 교회와 세우신 새 언약을 통해 우리신다.’(42) 세대주의가 이스라엘의 육적 회복을 지지하다면 조지 래드는 교회로 흡수된다고 보았다. 육적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경륜일 수 있으나 신약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빛도 비춰 주지 않는다.’(43) 이것은 이스라엘을 육적으로 회복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은 표적’(43)으로 봐야 한다. 즉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는데, 이스라엘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해석이다.

 

종말에 일어날 일들

 

3장부터 8장까지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이며 마지막 9하나님의 나라는 결론에 해당된다. 우리는 본론을 살피면서 저자가 생각하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의 일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3중간 상태는 구약과 신약을 오가며 중간 상태로 보이는 구절을 찾아 해석한다. 결론은 신약 성경은 중간 상태에 관해 별로 말해주지 않는다.’(61) , 중간 상태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4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룬다. 4장은 저자의 종말을 이해하는 핵심 주장이 담겨있다. 래드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 단계로 본다. 초림은 성육신 사건으로 결정적인 날(D-Day)’이고, 재림은 마지막 날로 승리의 날(V-Day)’이 된다.(75) 그러나 승리의 날까지는 아직도 많은 전투가 남아있다.(75)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용어로 재해석된다.(77) 저자는 여기서 재림을 완성의 날이며, ‘그의 나라를 그 성도들에게 가져다 주는 날이며, ‘메시아적인 왕으로 그의 나라를 다스리실 것’(77)이라고 단정한다. 이것으로 재림 직전에 역사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성경적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5장에서는 재림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용어들을 다룬다. 파루시아, 아포칼립시스, 에피파네아와 같은 단어다. 이 단어들은 두 사건이 한 사건’(91)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단일하며 나뉠 수 없’(92)다고 말한다. 6장은 교회는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환난 전에 휴거하여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한다.’ 교회는 핍박을 당할 것이며, 박해 속에서 순교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순교는 영원한 축복과 영광의 길이 되는 것이다.’(114)

 

7장에서 부활과 휴거를 다룬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의 논리를 피력하기에 중요한 부분인데 저자는 부활에 과하게 집중한다. 성도의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고,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한다. 부활의 몸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은 것이고, ‘성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 때 일어날 것’(131)이다. 그럼 휴거는 무엇인가? 살전 4:17에서 끌어올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휴거(rapture)이다. 조지 래드는 휴거를 살아있는 성도들이 죽음을 거치지 아니하고서 신령한 몸을 입게 되는 변화’(133)이다. 이미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게 된다면 살아있는 성도들에겐 휴거가 일어난다.’(133)고 말한다. 사실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 매우 논쟁이 많은 곳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에 동참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에녹과 엘리야가 살아있는 몸으로 승천했기 때문에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또한 저자는 이 장에서 계시록 20장에서 명백히 두 개의 부활을 예언한다’(134)고 주장한다. 역자인 이승구는 이것을 다음 쪽에서 권호덕의 <천년왕국>을 참조하라고 조언한다. 역자에게 직접 묻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역자는 둘째 부활을 지지하지 않은 것 같다.

 

9하나님의 나라는 저자의 주장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곳이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는 세상으로 미룬다.(184)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점으로 천년 왕국이 시작된다. 이때 첫 번째 부활이 시작된다. 저자는 두 번째 부활을 마지막 종말로 보고, 초림과 재림 사이를 지금으로 설정한다. 지금 성도들은 오순절에서 시작된 새로운 시대’(186)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말세는 성령을 통해 오는 세대의 축복을 미리 맛볼 수 있다.(185) 재림과 동시에 천년 왕국이 시작되며, 신자들이 부활한다.(131) 신자의 부활과 동시에 휴거가 일어난다.(133) 그리하여 그들은 생명에 참여한다.’(135) 성도들은 천 년 동안 재림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한다. 그럼 악인들은 무엇을 하는가? 아직 부활에 동참하지 못하고 둘째 부활 시에 둘째 사망즉 백보좌 심판을 받게 된다. 둘째 부활과 둘째 심판은 천년 왕국이 끝나는 역사의 종말과 함께 이루어진다.

 

나가면서

 

, 이제 몇 가지만 정리하고 마무리해 보자. 필자는 칼빈과 청교도들, 그리고 안토니 후크마가 주장한 무천년설을 지지한다. 먼저 저자는 마이클 호튼이 각주한 것처럼 아직도 역사적 전 천년설에 대한 가장 탁월한 진술자이다.(<재림과 휴거(The Blessed Hope)>를 언급한 것이며, 새물결플러스의 <현대신학 지형도> ‘종말론편의 각주다.) 현재 대부분의 보수적 신학자들이 지지하는 견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가장 한국적이라 할 만하고, 전통적 해석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무천년설을 따르는 이유는 후크만의 주장처럼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렇거니와 신약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308) 상식적으로 천년 왕국 동안 기존의 살아있는 사람들과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함께 지낸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조지 래드는 휴거하여 죽음을 거치지 아니하고서 신령한 몸을 입게 된다’(133)고 하지만 참으로 난해한 표현이다.

 

또 한 가지는 천년 왕국이 끝날 때 사단이 놓여 다시 훼방을 놓다는 요한계시록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지는 이해할 수 없다. 만약 부활의 몸과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성도들에게 어떤 사단의 훼방이 있다는 말일까? 저자의 논리를 따른다면 부활한 성도들이 아직 죄인으로 있는 거듭나지 않는 사람들을 통치하게 되는데, 이 또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무리한 해석은 조지 래드가 문자적 성경 해석에 치우쳐 부활을 두 단계로 구분하여 의인들과 부활과 악인들의 부활을 구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지 래드의 다른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 짓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필자의 판단으로 그렇게 보인다. 역자인 이승구 교수도 이 부분에 대해서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의 부록에 실리 종말론의 최근 동향을 살펴보도록 권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몇 가지 점에서 탁월하다. 먼저는 이해하기 쉽다. 사실 무천년론과 역사적 전 천년설의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마지막 재림 후에 일어나는 종말에 관한 것이기에 현재의 삶과 그리 연관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중요하다. 이 책은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환난 전 휴거를 거부한다. 이것은 고난 속에서 기꺼이 인내하거나 순교함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 또 하나는 역자가 주의를 준대로 3중간 상태에 대한 분명한 성격적 관점을 제시한다. 필자는 1, 2장의 해석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모호하지 않고 명징하게 성경적 해석의 토대를 마련했고, 세대주의가 가진 모순들을 폭로시킴으로 바른 성경적 종말론을 갖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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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균형 감각 익히기 돈에 대한 균형 감각 익히기
돈: 탐욕의 대상에서 사랑의 도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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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교회가 되는 길 마침내, 교회가 되는 길
마침내, 교회가 희망이다
박영호/복있는사람/모중현 편집위원


교회는 참으로 독특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위로를 받습니다.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영광과 위엄을 느낍니다. 우리의 어떠함보다 존재 자체를 받아주고 귀하게 여깁니다. 그 안에서 한없는 평안과 사랑을 누립니다.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로 인해 진정한 하나 됨을 경험합니다.반면 교회에서 우리는 좌절과 실패, 억울함의 기억도 있습니다. 세상보다 더하다고 생각들 때가 있습니다. 배제와 혐오, 편견과 차별이 만연합니다. 그것이 거룩함이라고 포장됩니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탐욕으로 눈...
이제야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 이제야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
따름, 그 회복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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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우리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누구를 만나는지와 그 만남의 깊이와 친밀함의 정도에 따라 변화의 폭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더 이상 나의 방법으로 헤어 나올 수 없을 때, 누군가의 만남이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음을 기억합니다.'복음'은 교리의 모음이 아닙니다. 해야 할 것들의 목록도 아니지요. '복된 소식'은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가장 큰 '좋은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되셔서 친히 우리에게 만나자고 말씀하시며, 손을 내밀어 주시고, 함께해 주시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그 ...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다면..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다면..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고
전원희/지우/모중현 편집위원


기쁨과 행복이 강요받는 시대입니다. 힘들어도 기뻐하라 합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감사하라고 합니다. 눈물을 빨리 닦고 다시 일어서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충분하게 울어보지도 못한 채, 경쟁의 틈바구니 속으로 재차 들어갑니다. 소리 내어 크게 충분하게 울고 싶었는데 말입니다.우리에게 어쩌면 슬픔에 오롯하게 잠기어 있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시간은 고요하게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이 됩니다. 아픔을 부둥켜안고 오랫동안 울어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눈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성경에도 기쁘고...
온전함을 위한 발걸음 온전함을 위한 발걸음
역설
파커J.파머(Parker J. Palmer)/김종훈 /템북/모중현 편집위원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 같지 않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자체로 역설입니다. 강렬하게 통합된 삶을 원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은 우리의 실제 삶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현실의 문제 앞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존재의 연약함으로 좌절하곤 합니다.개인적인 모순과 역설로도 벅찬데, 세상으로 나가면 더 큰 혼돈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부분이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겸손은 나약함으로 보이기도 하고, 진취적인 모습은 교만으로 비치기도 합니다.작가이자 교사, 활동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여정에 동참하는 일상 예수 그리스도의 여정에 동참하는 일상
고난은 사랑을 남기고
김기현/두란노/모중현 편집위원


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평소보다 더 많이 묵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십자가가 보다 분명하게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와야 한다고 느껴집니다. 우리 삶에서 십자가가 해석되고 적용돼야 한다는 말입니다.사순절의 기간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마음 깊숙이 새길 수 있는 유익한 절기입니다.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선명하게 우리의 일상과 맞닿을 수 있는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묵상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말씀 자체의 묵상도 ...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
버텨 줘서 고마워
한미연/세움북스/모중현 편집위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치유하는 일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공개적으로 추천하지는 않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밀하게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은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은사 자체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는 열린 마음이겠지요.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때로는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적당하게 지혜롭게 살아가도 괜찮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양하고,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성향과 은사에 맞게 필요한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인내와 순종의 삶에 하나님은 세밀...
그림을 통해 꿈꾸는 세상 그림을 통해 꿈꾸는 세상
교회 옆 미술관
구미정/비아토르/모중현 편집위원


예술에 관심은 많지만, 듣고 보는 것을 잘 이해하고 누리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중학생 때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피카소 작품전이 생각납니다. 처음으로 접하는 그림이 하필 피카소라니요. 뭔가 모를 꿈틀거림이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렸습니다.작품을 대할 때는 사전 지식과 더불어 직관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공명할 때 제대로 작품을 알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깊은 감동을 경험합니다.특별히 성경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성화...
하늘과 땅을 잇대는 교회 하늘과 땅을 잇대는 교회
우리는 날마다 교회가 무엇인지 묻는다
이재학/샘솟는기쁨/모중현 편집위원


개인적으로 신학의 각론 중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교회론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과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적 교회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로서 교회가 존재해야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슬프고 암담하기까지 합니다.물론 성경에서 나오는 초대 교회도 말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그 갈등을 중재하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고자 바울은 편지를 적었습니다. 바울은 완벽하게 정리된 교리 모음집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교회의 어려움과 문제에 대처하고자 그 상황에 가장 걸맞은 처방전을 제...
장벽을 넘으시는 예수님 장벽을 넘으시는 예수님
비트 주세요, 주님
지푸, 최재욱, 이창수/이야기가 있는 집/모중현 편집위원


참 많은 장벽이 존재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교회에 더 많은 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거룩'이라는 단어는 좀 더 정제되고 점잖은 표현이나 태도를 뜻하게 된 듯합니다. 기존의 문화와 다르면 재빨리 선을 그으며, 세속적이라 비난할 때도 있습니다.그 틈을 메우려 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성속의 이분법을 완전하게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가령 힙합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만, 언어는 부드러워야 하며, 내용은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아직도 힙합이나 랩이라는 도구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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