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자리가 사람을 만들 수 있나?
자리가 사람을 만들 수 있나?
교회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교회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교회가 스스로 고치지 못하니 이제는 세상의 법정에서 교회를 재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살아내야 할 교회가 말씀을 등지면서 살아 왔으니 부패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전에 청문회에서 부동산 투기와 관련하여 질의를 하는 중에 서로를 향해 ‘권사, 집사’라 하며 싸우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온 세상이 부끄러웠다.
교회의 타락과 변질에 대한 다양한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중에서도 교회와 성도가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일리는 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심겨진 말씀을 가지고 실제 삶에서 변화되어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용모가 변화되었듯 우리에게는 그런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과연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교회가 이렇게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도덕과 윤리와 세상적 영향력으로 나타나는데 그 물리적 수치가 교회를 평가하는 진정한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원하는 섬김과 구제를 많이 한다고 교회가 칭찬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선한 사업과 관련된 일들은 일반 단체에서 훨씬 더 잘 감당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구호단체가 아니라 구조단체인 것을 생각한다면 그런 도덕성으로 평가될 것은 아닌 것 같고 그 기준도 흐릿하다.
그 외에도 교회가 머리 빠진 삼손처럼 힘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신학의 부재와 거룩의 상실과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등을 말한다. 이미 언급한 윤리적 실패와 신학과 복음과 목사의 타락 등 많은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의 회복을 위해 도덕과 거룩을 위한 실천운동이 펼쳐지고 있고, 대중신학의 향상과 발전을 위해 좋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교회와 성도의 성숙을 위해 아주 중요하고 효과적인 일이다.
게다가 구원론과 성령론과 기독론과 종말론과 하나님 나라 등 다양한 가르침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신학만으로 교회를 바르게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보면 신학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도덕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도 아니다. 교회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초신자가 아니라 대부분 직분자다. 직분을 받았지만 그 직분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직분론의 무지가 교회를 힘들게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만나고 복음을 깊이 이해한 사람들이라면 직분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다를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교회에서 세워지는 직분을 사회에서 통용되는 직분으로 이해하면 큰 병폐이다. 이 직분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교회에 선물로 주신 것이며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향한 순종을 통해 교회를 세워가는 직위이다. 이것은 결코 계급이 아니며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자연스럽게 받는 것도 아니다.
직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에 현대교회는 직분을 받을 때 거대한 헌금을 요구한다. 성도 다음에 주어지는 것은 집사이고, 집사 다음에는 장로가 되는 서열로 이해한다. 계급 위에 계급이 있을 수 없는데 직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교회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교회직원을 선발하는 투표에서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사람을 통해 세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떨어져서 교회를 떠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도 발생한다.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교회의 성장과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기 위해 헌금을 받고 직분을 주는 행위이다. 이것은 엄격하게 성직매매이다. 중세 때 종교개혁자들이 목숨을 걸고 부셨던 제도를 현대교회가 아직도 행하고 있다. 교회의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받아 직분을 주기도 하고, 선발이 되었으니 어느 정도의 헌금을 받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 자리에 사람을 세우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에 뽑아놓는 경우도 있다. 교회와 예배를 섬기기 위해 세워진 직분이 남용되고 오용되고 있다.
교회에 직분자가 많다고 좋은 것일까? 필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형교회는 누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데 투표를 하여 사람이 선발된다. 1~7부까지 한 지붕에 7개의 교회가 있는데 어떻게 직분자가 세워질 수 있단 말인가? 당회를 통해 선발되는 인원이라 해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작은 교회라고 다 건강한 것은 아니다. 목자의 막강한 권력과 인간적인 이유로 선발되는 경우들이 있다. 교회에 힘을 실어야겠다고 뽑기도 하는데 그 발상자체가 세속적이다. 그러니 선발된 사람이 교회에 힘을 빼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직원을 세움에 있어서 바울서신과 사도들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선발해야한다. 교회의 예배와 심방과 구제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세워야 한다. 다른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직분은 존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을 돌보기 위하여 존재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든든히 세워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한 명의 목회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부여하여 그 사람의 지시만 따르기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도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물론 교회에서도 어느 정도 그 자리에 서면 그 직분에 맞는 사람으로 변해 갈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뜻을 따라 그 자리에 사람을 초빙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 맞는 사람으로 변화되라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직위에 맞는 사람이기에 세우는 것이다. 그 자리에 설 가능성이 보이기에 세우기보다 그 자리에서 기쁨으로 섬겨달라고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는 것이다.
현대교회는 직분에 대한 이해가 너무 황폐화되어 교회에서 항존직이 되면 벼슬인 줄 알고 명예직으로 여긴다. 언제 교회의 직분이 관리직이 되었던가? 높은 직분이고 오래된 직분자일수록 관리하고 감독하려고 한다. 목회자를 말씀으로 인도해주고 양육해줄 사람이 아니라 자기들이 선택한 고용인으로 여긴다. 교회의 이윤을 극대화하여 많이 남겨야 사역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름 없이 살던 사람이 완장 찼다고 갑자기 고개 들고 큰소리치며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는 눈살 찌푸리는 일들을 본다.
책 제목처럼 직분을 알면 교회가 보인다. 그리고 그 교회 직분자를 보면 그 교회가 보인다. 직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이기 위해 준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계셨을 때 하셨던 일을 대신 할 수 있도록 주신 도구이다. 결코 권력과 관직이 아니다. 사람을 만들고 키우기 위해 주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의 일을 대신해 달라고 주님의 종을 세우는 자리이다. 지금까지 사람을 잘못 세워서 교회가 얼마나 갈등을 하고 신음을 했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며, 신실한 직분자들 때문에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져가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