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반쪽의 이해
반쪽의 이해
80년대 후반의 대학 초기부터 우연찮은 계기로 일반적인 사랑의 정의부터 크리스천의 데이트와 사랑, 그리고 결혼과 관계된 책을 나름 적지 않게 읽게 됐었다. 스탕달의 연애론과 요한네스 로쯔의 사랑의 정의, 월터 트로비쉬나 폴 투르니에의 고전적 책들을 비롯하여 래리 크랩 등의 상담 및 심리와 연관된 다양한 책들, 그리고 국내 저자들의 책들, 그리고 당시는 인터넷이나 성경 프로그램이 없었기에 성경에 나타나는 사랑과 관련된 구절들을 주제별 성경대사전에서 찾기도 했고, 철학대사전을 통해 철학적 정의를 찾아보기도 했다. 여러 성경공부 교재를 공부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당시에 나침반 출판사에서 나온 제자훈련 시리즈의 내용들을 개인적으로 좋아했었다. 그것을 토대로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강의도 했었고 캠퍼스에서 과내 여러 사람과 연애하다가 주먹을 맞아본 경험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후배들을 양육하며 데이트 중이거나 결혼 전 커플을 상담하고, 깨어지거나 문제 있는 이들의 심각한 문제를 적지 않게 도움을 주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성경적 연애와 결혼 그리고 남녀 간의 차이에 대해 나름 상당한 연구와 상담도 했지만, 이론과 실제가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내 자신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럴 수 있었다. 성경적 원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실제화하고 적용하는 측면에서는 여러 가지 변수와 보지 못하던 요소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더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내 자신이 그렇게 책을 읽고 상담을 하면서도 결혼했던 30살 전까지 강압과 협박(?)에 의한 소개팅 한번 외에는 미팅 한번 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연애도 없었다는 것이다. 짝사랑은 꽤나 했고 여자 친구들은 많을뿐더러 주변에 양육하던 후배들이 상당수가 자매였지만, 그리고 ‘오빠 같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요’라는 말도 꽤나 들었지만(그 이야기는 결혼 후에만 들었다), 정작 내 자신은 그런 경험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의도치 않게 어르신들 가정사까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적도 있었고, 그 속에서 결혼과 남녀관계에 대한 성경적 원칙과 원리를 이야기하였는데도, 정작 내 자신의 경험은 없었다. 그렇다고 성경적 가르침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옷으로 따지면 기성복일수 밖에 없었다. 특히 당시의 많은 결혼과 가정을 다룬 번역서들은 우리나라의 문화와는 상당한 간격이 있었고, 또 그들의 문화 속에서 행동원리가 나오므로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국내필진의 책들도 있었지만 은연중에 미국의 기독교 문화를 바른 문화인양 받아들이는 문제로 국내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던 중 3년하고도 3일간의 연애후의 결혼, 그리고 십이 년이 넘는 결혼생활 속에서 내가 지금까지 가르쳐 온 것을 우리 부부와 나의 딸에게 적용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 속에서 시행착오와 실수도 경험했다. 누구말대로 결혼은 처음 해보는 것이기에 실수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좀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각각의 사람들과 사례에 맞춘 맞춤형 상담을 하게 되었다. 상담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문제해결이 금방 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몇 개월 아니 몇 년을 꾸준히 돌아보고 상담해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점이다. 연애부터 결혼 그리고 지금까지의 십여 년을 비정기적으로 상담하는 경우도 있다. 주사 한방과 같은 말 한마디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표면적으로 돌출되고 나서야 부부간의 문제를 심각하다고 들고 오지만, 이미 겉으로 표출되고 나서는 수습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리고 부부간이나 연애하는 이들의 많은 문제는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거나 실제적인 사례들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그 원리를 찾고 적용하고, 우리의 현재적 상황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로서 해결원리를 찾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릭 존슨의 ‘더 좋은 반쪽이 되는 법’은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 제목이 더 맘에 드는 것은 아내를 전화번호나 글에서 호칭할 때 쓰는 용어가 ‘나의 반쪽’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좋아하는 것은 쉘 실버스타인의 ‘이가 빠진 동그라미’라는 동화마냥 어쩌면 인간은 자신을 완성시킬 그 대상을 찾는 작업을 벌인다. 그것은 친구를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결국 가정공동체를 통해 완결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몸을 이룬다는 것은 육체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영역까지라 말할 수 있다. 특히 벌거벗었다는 것은 서로간의 투명성이다. 서로에게 숨김도 없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일 게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이 결합은 불완전해지고 그 투명성도 제한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결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좀더 회복되긴 하지만 아직 완전한 영화를 이루지 못했기에 한계성이 있고, 또 노력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책은 바로 그 서로를 좀더 알아가고 배려하기 위한 책이다. 그런 점에서 ‘반쪽’이란 표현은 적절하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남성을 이해하는 쪽으로 2부는 여성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나의 반쪽이라는 것은 똑같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똑같다면 이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굳이 반쪽으로도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서로 다르기에 서로간의 도움과 결합 없이는 불안정하고 하나됨으로써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그 점을 남성과 여성의 차이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지혜롭게도 남자를 모드(mode), 여자를 무드(mode)로 분석함으로써 그 특성과 성격을 잘 표현한다. 그가 1, 2부에서 다루는 것들이 결국 모드이냐 무드이냐를 통해 그 특성이 달라지고 관점의 상이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저자는 기존 책들이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는 쪽에 많이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책에서는 보다 실제적인 영역들과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읽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종종 이런 부류의 기독교 책들이 경건이란 이름으로 실제적이고 생활적인 부분을 다루지 않는 한계를 드러내는데, 저자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부분들을 건드림으로써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가정의 문제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도 도움을 준다.
지나치게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점은 좀 불만이고, 앞부분에서 성경을 통해 본 가정과 부부의 의미를 좀더 다루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저자는 그 영역을 아마도 다른 책에서 다루었거나 기존의 책들에 그 책임을 맡긴 듯싶다.
추신: 이 책은 꼼꼼하기로 소문난 채천석 목사님이 번역하신데다가, 부부관계를 다룬 책으로서 사모님과 같이 번역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더욱 신뢰가 간다.